5 사회심리론

박설호: (4) 지배 이데올로기, 혹은 해방으로서의 성(性)

필자 (匹子) 2025. 4. 22. 09:22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성 윤리의 원칙에서 성 경제학의 원칙으로

 

성 경제학의 원칙은 시민주의 성 윤리에 대한 라이히의 구체적인 비판을 통해서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시민주의의 가족 체제, 둘째로 중매 혹은 강제 결혼, 셋째로 일부일처제를 차례대로 다룬 뒤에 라이히가 의도하는 성 경제학적인 대안을 개진하려고 한다.

 

첫째로 강제적 윤리를 고수하는 가족은 초기 자본주의시기에 경제적으로 소규모의 경영 체제였다. 물론 오늘날 농업 및 가내 수공업자의 가정에서도 강제적 성 윤리가 지배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고도로 발전된 후기 산업 사회에서의 강제적 성 윤리는 유연하고도 관대하게 변모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성서 구절도 있듯이, 과거의 케케묵은 형식은 현재의 인간 삶의 내용을 원래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둘째로 강제적 가족은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경제적인 그리고 성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여자와 아이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감시일 수 있다. (각주: 이러한 견해는 미셸 푸코에 의해서 제기되기도 했다. M. Foucault: Wahnsinn und Gesellschaft, Frankfurt a. M. 1984, S. 97f.).

 

실제로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많은 부부들의 이혼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가 경제력이 없는 여자들에게 일자리 내지는 사회 보장책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다. 셋째로 가족의 정치적인 과업은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공장으로서 임무를 다하고 권위주의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각주: 렇기에 가족은 사회의 경제적 구조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 사이의 중재자나 다름이 없다. 이를테면 가장은 국가의 권위를 가정 내에서 행사하는 대리인 내지는 대표자이다. 그는 생산 과정에서의 직위 (하인)와 가정에서의 역할 (주인) 사이의 모순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군대식으로 말하면- 상사의 유형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테면 그는 상류층에 머리를 수그리고, 지배하는 제반 견해들을 모조리 흡수한다. Siehe W. Reich: Die sexuelle Revolution, a. a. O., S. 88f.). 강제적 윤리를 표방하는 가정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초병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둘째로 결혼 이데올로기는 지속적인 일부일처제의 결혼 생활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일부일처제의 지속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해나가야 한다고 한다. 사실 사회에 통용되는 결혼과 가정을 일탈하게 되면, 사람들은 전혀 위안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에 모든 물질적인, 법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보호 장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평생의 혼인을 유일하고도 필연적인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각주: 예컨대 금슬이 좋은 부부는 도덕적으로 무조건 훌륭한 사람들이고, 이혼 내지 별거 부부는 인성적 (人性的)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섣불리 단정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생각은 라이히에 의하면 틀린 게 아니라, 일방적인 사고이다. 성 경제학에 바탕을 둔 애정 관계에 관한 라이히의 발언을 직접 인용해 보기로 하자.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의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일시적으로 혹은 오랫동안 성의 공동체를 영위하지 못하도록 막을 권한은 없다. 그는 다만 자신의 파트너와의 관계를 끊거나, 그 파트너를 사랑에 의해서 다시 차지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서) 파트너의 제 삼자와의 애정 관계를 용인하는 권리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 자기가 사랑하는 파트너가 남의 품에 안겨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고통과 질투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질투심을, 어떤 소유하려는 질투심과 구분해야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파트너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행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는 지극히 부자연스러우며, 말하자면 부차적 충동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결혼 생활에서 혹은 오랜 동거 생활에서 전혀 성 관계를 갖지 않는 사람이 자기의 파트너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어떤 다른 방법의 관계 맺는 것을 금지하는 경우 말이다.” (각주: W. Reich: Die sexuelle Revolution, a. a. O., S. 49.).

 

라이히는 간통과 매춘을 예로 들면서, 일부일처제라는 이상과 실제 현실 상황 사이의 괴리감을 자주 지적하고 있다. (각주: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일처제는 결혼한 남녀의 성 감정을 둔화시키고 있는가? 라이히는 이 문제 및 여러 가지 해결책을 다음과 같은 문헌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Siehe W. Reich: Frühe Schriften II, Frankfurt a. M. 1985, S. 145 - 154.). 간통과 매춘을 패륜 및 죄악으로 규정하는 성 과학자들과는 달리, 라이히는 간통 내지는 매춘의 방법을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사람들을 불행한 영혼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라이히에게 중요한 것은 일부일처제가 옳은가, 사르트르 (Sartre) 방식의 계약 결혼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 동물”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을 충족시키며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출현하는 것은 심장 압박 증세, 불면증, 우울증 등과 같은 증세를 보이는 끔찍한 노이로제이며, 나아가서는 신비주의나 전체주의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비민주주의의 인간형을 낳게 한다.

 

요약하자면 라이히의 성 경제학은 시민 사회에서 통용된 강제적 성 윤리를 배격하고, 개개인의 자율적인 자기 조절 원칙에 의한 새로운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율적인 자기 조절 원칙은 첫째로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성 윤리가 극복되고 난 다음에, 둘째로 사회가 가급적이면 유연하고 관대하며 된 다음에, 셋째로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이른바 남성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사라진 다음에 형성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라이히는 개개인의 자율적인 자기 조절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첫째로 라이히의 주장에 의하면 부모는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성을 부인하고 감추는 교육을 지양해야 한다. 아이들은 출생한 즉시 금욕적 교육을 받게 된다. 전형적인 소시민 가정은 어떤 특정하고도 특수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식들에게 결혼과 가족의 중요성을 심화시킨다. “수음을 하지 말라.” 라는 가정교육의 강령은 결국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에 대한 관심을 사디즘의 욕망으로 환치시키도록 작용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성에 대한 지적 욕구를 완강하게 억압한다. (각주: W. Reich: Eltern als Erzieher. Der Erziehungszwang und seine Ursache, Stuttgart 1970, S. 7f.). 성에 대한 과잉된 수치심과 호기심은 성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잉태시키고, 변태 성욕 내지는 성폭력을 야기한다. (각주: 성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음담패설 내지는 칙칙한 장난으로 취급하는 어른들의 경향은 성도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성을 경시하고 있는 반면에, (세계 보건 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지구 전체 인구의 10%가 되는) 일부의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경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라이히의 두 번째 대안은 아주 급진적이다. 젊은이들이 포옹 행위만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며, 그들이 서로 한 번도 동침하지 않은 채 결혼한다는 것은 병리학적인 차원에서 비위생적이라고 한다. 아울러 기성세대는 사춘기의 청소년 소녀들 건전한 사랑 및 성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독자적인 거주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 부모와 교사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억압과 간섭 없는 삶을 보장해주는 일, 성 문제에 오로지 근엄하기만 한 교육자들의 의식 개혁에 관한 문제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각주: W. Reich: Die sexuelle Revolution, a. a. O., Vorwort, S. 10.).

 

8. 성 경제학의 문제점

 

라이히의 성 경제학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윤리를 고려할 때 너무나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라이히가 이미 30년대에 제기한 성에 대한 내용은 오늘날 유럽이나 북 남미에서 거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유럽인과 북 남미 사람들의 생활 습관으로 거의 정착되고 있는 실정이다. (각주: 그렇다고 해서 동방예의지국이 라이히의 견해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라이히의 이론에서 인식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심리적 건강의 중요성 및 비민주주의의 인간형의 양산 (量産)이다.).

 

그렇다면 라이히의 성 경제학은 어떠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가? 첫째, 라이히는 인간의 욕망, 자의식, 재능, 신앙심 그리고 예술적 기쁨 등을 오로지 성에, 그것도 인간의 생식 기관의 기능과 연결시키고 있다. 가령 인간의 고결한 신앙 (이웃 사랑, 자비 등)은 반드시 성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찌 칠순 노인 노파들의 (거짓된, 혹은 진정한) 신앙심이 라이히가 말하는 “성기의 포옹”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술 창작의 즐거움 내지는 예술 작품을 대할 때 느끼는 환희 등은 성과 관련되나,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성에 대한 만족으로 귀결될 수는 없다. 둘째, 라이히는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 등과 같은 체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라이히의 논리에 의하면 모든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등에 규정된 내용은 그자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기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의 혁명”에 기술된 라이히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굶주리지 않는 자는 식량을 훔치려는 욕망을 느끼지 않으며, 절도를 막으려는 윤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 법칙은 성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적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성폭력을 행하지 않으며, 성폭력에 대항하는 윤리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생활에 대한 “성 경제학적인 자기 조절”은 규범적인 규칙화 대신에 제기되는 것이다. 공산주의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 역주)는 -성의 법칙에 대한 불명확한 입장으로 인하여- 시민주의 윤리라는 형식 성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성생활의 내용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소련 사회에서는 소위 옛날의 윤리를 교체시킬 수 있는 “성생활에 대한 새로운 윤리”가 형성되었다. 이는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올바르지 못하다. 국가가 국가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국가 자체를 완전히 “멸망시키”듯이 (레닌), 윤리의 형태는 변화될 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이르러 완전히 사멸되어야 한다.” (각주: W. Reich: 앞의 책, S. 23.). 

 

여기서 라이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이 아무런 제약 없이 성취되는 사회를 노동 민주주의의 사회라고 규정하면서, 윤리적 규범을 사멸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각주: “노동 민주주의”란 개개인이 자발적이고 독자적으로 노동을 영위하며 아무런 외부적 간섭 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형태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조직, 집단과 같은 정치적 체제는 아니다. 노동 민주주의는 사회학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창조되는 삶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옛날부터 인간이 외부나 상부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삶의 법칙에 의하여 옛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진 인간 삶의 범례일 뿐이다.). 라이히가 유토피아로 파악한 노동 민주주의는 마르크스가 암시한 계급 없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노동 민주주의가 성립되려면, 첫째로 계급 갈등이 해결되어야 하며, 둘째로 사회 전체가 부를 이룩해야 하고, 셋째로 강요된 성 윤리가 사라져야 하며, 넷째로 모든 사람들이 재물과 성에 대한 소유 관념을 자연스럽게 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라이히가 갈구하는 노동 민주주의는 한 세기 혹은 수 천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핵심적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안고 있다. (각주:그렇지만 실제로 지구상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나라가 있다. 예를 들자면 스위스, 스웨덴 그리고 독일을 들 수 있다. ). 셋째, 거시적으로 고찰하면 우리는 라이히의 이론이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의 체제를 경제 및 사회 구조로 파악하는 태도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세부적 사항을 고찰하면, 우리는 자크 라캉, 미셸 푸코 등이 관심을 둔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논의, 이를테면 두 이론의 접합 가능성의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욕과 성욕의 문제, 다시 말해서 계급 갈등과 성의 빈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난제들이다. 그러나 ‘정신 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가 접합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형식 논리에 대한 학문적 욕구만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라이히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합시키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다만 “파시즘과 대중 심리”라는 책을 통해서 계급투쟁과 성욕의 관련성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을 따름이다. 그 외의 책들은 정신 병리학 연구 그리고 노이로제 치유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히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인 굶주림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식욕의 문제를 인간이 해결해야 할 일차적 과제라고 간주하였으며, 그 다음의 문제인 성욕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을 따름이다. (각주: 따라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에서 특히 라이히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상호 종합 내지는 절충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라캉과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적 취약점을 성의 문제에서 찾아내면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담론을 개진하려고 한다. 특히 푸코의 이러한 태도는 (발리바르가 비판한 바 있듯이) 계급 문제와 성이라는 전혀 다른 두가지 차원을 상호 절충시키고 있을 뿐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교훈, (윤소영 역), 문화 과학 3호, 93년 봄호, 59 - 60쪽 참조하라.).

 

마지막 네 번째 사항으로서 우리는 변태 성욕에 관한 라이히의 불충분한 연구 및 치유 방법을 들 수 있다. 라이히에 의하면 “혼음에 대한 노이로제의 사고는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게 하고, 억압된 동성연애에 대한 욕구 내지는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단순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 (각주: Siehe W. Reich, Frühe Schriften II, a. a. O., S. 149f.). 물론 라이히의 발언은 가치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만 자연과학적 입장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변태 성욕을 낳게 하는 인간의 성향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규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일 뿐이다. 예컨대 동성연애에 대한 가치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무릇 성에 대한 제반 일반적인 견해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주관적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두 사람의 애정 관계를 제 삼자의 시각에서 함부로 평가 내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개별적이고도 특정한 난제를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변태 성욕에 관한 라이히의 불충분한 연구는 보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로 라이히가 집중적으로 추구한 ‘해방으로서의 성’이 실현될 것이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