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5. 성의 억압을 통한 병리학적인 결과
일단 앞장에서 언급한 내용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성의 억압은 가부장주의의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의 윤리로 정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일부일처 제도를 생각해 보라. (엥겔스는 일부일처제가 생겨나는 시기를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사회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파악한 바 있다. 이로써 여성의 노예적 삶은 당연한 덕목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각주: Siehe Fr. Engels: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Frankfurt a. M. 1978, S. 71 - 75.). 이러한 성 윤리는 부차적이고 병적인 충동을 제거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요구 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일차적 충동마저 약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인간 삶을 건강하게 하는 일차적 충동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 사회의 성 윤리의 원칙을 파기하고, 자생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 성 경제학 원칙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생적으로 이행될 성 경제학적인 원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을 억압하는 제반 사회적 인식을 밝혀내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건강한 성생활을 실천하도록 유도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제 7장에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라이히는 성을 감추고 억압하는 시민 사회의 성 윤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성의 억압이 끔찍한 노이로제로 이어진다는 정신 병리학적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성의 억압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혹은 종교적 권력에 맹종하게 한다는 사회 심리학적 입장이다.
일단 첫 번째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경 정신 질환에 대한 라이히의 의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인간 심리의 건강은 무엇보다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 행위 시의 성적 흥분이 최고의 정점에 달하는 체험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체험 능력을 통해서 노이로제와 반대되는 성격상의 특성을 견지하게 된다.”
2. “심리적 병리 현상은 자연스러운 사랑의 능력이 방해 내지는 차단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생물학적 에너지를 언제나 체내에 축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히스테리와 같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통해서 내면의 축적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향해 방출시킨다.”
3. “심리적 병리 현상은 사회의 성적인 무질서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무질서는 수천 년 전부터 인간으로 하여금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 예속되게 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민주적이고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고, 기계화되고 권위주의적인 문명을 더욱더 공고하게 한다.” (각주: Siehe W. Reich: Die Entdeckung des Orgons. Die Funktion des Orgasmus, Köln 1987, S. 72 - 91; “성적인 무질서”는 ‘성 윤리가 자연스러운 성 생활을 실천할 수 없도록 강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직결되는 말이다.).
필자는 정신 병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히의 이러한 주장을 정확히 평가할 능력을 아직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상기한 인용문에서 라이히가 주장하고 있는 바에 대해 일단 조심스럽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항에 대하여: 성의 에너지란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의 구조를 형성시키는 물리적 조직체의 생물학적으로 축조된 에너지이다. 성 (性)은 “생리학적인 미주 신경 (迷走 神経)의 기능”과 관계되는데, 라이히에 의하면 창조적 삶의 에너지이다. (각주: W. Reich: Dei sexuelle Revolution, a. a. O., S. 18.). 물론 건강한 인간 심리의 정서는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관계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이 건강한 인간 심리의 정서에 대한 충분조건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어쨌든 라이히의 주장은 성격과 성에 대한 분명한 관련성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성격이란 명실 공히 성 (性)의 격식 (格式)이다. 성격의 기능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오욕 칠정 및 성적 감정을 외부로 유출시키고 상대방의 그것을 내부로 받아들이는 통풍구의 역할과 다름이 없다. 가령 라이히에 의하면 사람들은 4 - 5세의 나이에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의 패턴을 배우게 되는데, 이로써 형성되는 것이 성격이라고 한다.
두 번째 사항에 대하여: 물론 라이히의 이러한 주장이 전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 병리 현상 가운데에서 편집 분열증, 광기 (Mania) 등은 성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성 문제와 직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이크로프트는 라이히의 이러한 주장을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라기보다는 “성에 대한 라이히의 과대평가”라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각주: Charles Rycroft: Wilhelm Reich, (moderne Theoretiker Serie) München 1972, S. 51.). 세 번째 사항에 대하여: 성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은 정신 병리학적 차원에서 볼 때 악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거의 일반적으로 기본적 삶의 기능을 방해하도록 작용한다. 그렇다면 성 에너지의 억압은 특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6. 신비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
라이히에 의하면 성에 대한 억압은 내면에 축적된 에너지를 다른 곳에서 비합리적으로 방출시킨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은 인간 행위의 심리적인 투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범죄 심리학에서 수많은 범례로 등장하곤 한다. 라이히는 오랫동안 성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행위에서 어떠한 특성을 찾아내고 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목표에 상응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 광기, 신비주의 그리고 자발적인 전쟁 참여 행동” 등이다. (각주: W. Reich: Die sexuelle Revolution, Vorwort III, a. a. O., S. 18f.).
성의 억압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금욕을 강조하거나 성을 외면하는 윤리에 의해서 정당화되어 왔다. 이러한 윤리는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구조를 형성한다. 국가의 덕목, 종교적 금기 사항 그리고 결혼 제도 - 이 모든 것은 한결같이 성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법, 도덕 그리고 관습은 주어진 사회에서 하나의 (성을 감추거나 부인하는) 통념을 형성하고 있으며, 개개인의 사람들이 (사려 깊은 통찰로써 의심하지 않으면) 이러한 통념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무척 어렵다. 어릴 때부터 소위 “금욕의 도덕성”을 가정에서 충실히 교육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 독립성을 권위주의적 사회의 제반 체제 (가정, 고향, 국가)에 빼앗기게 된다. 아니, 그들이 자아 독립성을 제반 체제에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헌납한다고 말해야 옳으리라. (각주: 그렇기에 “물질적 욕구의 억압은 인간을 반역으로 이끌지만, 성적 욕구의 억압은 도덕적 방어로써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억압에 대한 반역마저 억압하는 효과를 갖”는다. 강내희: 앞의 논문, 35쪽.).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 시절에 자신의 고유한 가치관 및 세계관을 정립시킨다.
그러나 이것들은 개개인의 고유한 독자적인 비전이라고 섣불리 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유년 시절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놀이터에서 주어진 사회적 통념의 정당성을 암묵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회적 통념은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권위적 척도”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라이히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자유 및 존재를 구속하는 어떤 사악한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그들은 만약 어딘가 의존하지 않으면, 내면의 불안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척도는 사라졌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과 불안으로 인하여 대중 심리학적 토양에 뿌리내리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한편으로는 권위에 대한 두려움, 예속성, 과장된 겸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디즘과 같은 잔학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대체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종교적 신비주의에 경도하게 되고, 외향적인 사람들은 정치적 권력에 맹종하게 된다. (각주: 신비주의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은 반드시 인간의 보편적 신앙심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나 욕망을 하나의 틀에 가두려는 권력 체계로서의 교회로 향하고 있다고 말해야 타당하다. 지금까지 유럽의 교회는 인간의 죄악을 언제나 다만 성적 방종에서 찾으려고 했으며, 오로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위정자 및 기득권 세력들의 관심사와 동맹 관계를 맺어왔다고 한다. 라이히의 이러한 입장은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를 인간 삶에 대한 세 가지 죄악이라고 규정한 로버트 오언 R. Owen의 태도와 흡사하다.).
종교인은 신앙을 통해서 종교적 황홀감을 체험한다. 그것은 육체적 욕망보다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세계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가운데에서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라이히가 “종교적 황홀은 오르가즘의 생장적 흥분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는 억압 가설이다. 라이히에 의하면 종교적 황홀감을 느끼는 신앙인은 결국 성적 에너지를 방출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근육의 피로와 정신적 피로를 낳을 뿐이라고 한다. (각주:W. Reich: 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 1971 Köln, S. 145; (한국어 판)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과 대중 심리, (오세철 외역), 179쪽.).
권위주의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정치 권력에 복종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복종은 근본적으로 이율배반적이다. 그들의 정서는 권위를 두려워하고 거의 과장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지만, 속으로는 권위를 짓밟으려는 사드 마조히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근성은 폭군을 모시는 아첨하는 신하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감정으로, 스승에 대한 제자의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낡은 사상에 대한 새로운 사상의 관계로 확장될 수도 있다. 라이히는 파시즘 및 이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을 예로 들면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려는 대중 심리학적 모티브를 성도착증에서 찾고 있다.
라이히에 의하면 파시즘은 젊은이들을 가정, 고향 그리고 조국이라는 체제에 맹목적으로 종속시키려고 한다. (각주: 고향과 조국이라는 파시즘의 슬로건은 어머니와 가족이라는 개념과 묘하게 통하고 있다. W. Reich: ebd., S. 70f; (한국어 판: 파시즘의 대중 심리), 88쪽.). 인종 이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금욕에 대한 정당성을 은근히 반영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예컨대 바흐오펜은 『모권 Das Matriarchat』이라는 책에서 “유대인들은 더럽고, 음탕하며 박카스의 축제를 즐긴다면, 아리아인들은 깨끗하고, 위엄이 있으며 순수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파시스트들은 그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다. (각주: 바흐오펜의 이러한 입장은 ‘과거를 동경하는’ 독일 낭만주의자의 세계관과 궤를 이루는 것으로서, 백년 후에는 ‘중세를 동경하는’ 히틀러식의 국가 사회주의로 발전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발언은 한편으로는 “돈과 여자”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질투심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금욕을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종 이론은 -라이히에 의하면- 소위 가부장적 사회에 의해 생겨난 성의 억압을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의 토대로 삼으려는 변태 성욕자들에 의해서 출현한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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