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
프로이트는 충동의 억압과 충동의 포기란 오래 전에 등장한 죄의식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간접적으로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이고 강제적인 성 윤리를 정당화 내지는 합법화시켜준 셈이다. 왜냐하면 강제적 성 윤리에 의하면 성은 반드시 억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죄의식을 원시시대에 있었던 부친 살해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부친,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차지하려는 욕구는 비단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조직, 도덕적 금기 그리고 종교에서도 유사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각주: Sigmund Freud: Totem und Tabu, in: Gesammelte Schrften, Bd. 10, S. 172. 이를테면 그의 책 “남자 모세와 단일 신의 종교 (Der Mann Moses und die monotheistische Religion)”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유태교와 기독교의 갈등 및 이전 문제를 논하고 있다.). 권력과 성에 대한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권력과 성을 마음대로 행하는 어른에 대한 경외심과 부러움에 기인하는 것이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연적 (恋敵)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와 관련된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아들의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는 것은 후회의 감정 내지는 죄의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대용물인 토템을 죽이기를 망설이게 되며, 자유를 되찾은 여자들 (특히 어머니)과 정상적으로 성 관계를 치르지 못한다. 아들은 근친상간의 금지 및 토템 동물에 대한 살육의 금지라는 두 가지 계명을 창조하는데 (각주: S. Freud: Totem und Tabu, a. a. O., S. 173. (한국판) 프로이트: 토템과 타부, 김종엽 역, 문예 마당 1995, 176 - 177쪽.),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의식은 노이로제라는 병적 증세를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라이히는 인류의 문명 및 문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가설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로이트의 상기한 논의 사항은 -라이히에 의하면-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고, 프로이트가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개진한 변증법적인 모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각주: 여기서 “변증법적인 모순 논리”라는 개념은 라이히가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 개념은 “현실적 모순 논리”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논리적 대상을 직접 현실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머릿속에서 표상된 현실에서 찾아내는 논리이다.). 만약 인류학이 원시 시대의 성생활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가 있다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사실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가설로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라이히는 그의 저서 “강제적 성 윤리의 출현”에서 원시 시대에 존재했던 씨족 집단의 성생활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1930년에 간행된 인류학자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B. Malinowski)의 “원시인의 성생활”이라는 책을 토대로 한 것이다. (각주: B. Malinowski: The Sexual-Life of Savages in Northwestern Melanesia, London 1929; 말리노프스키의 다른 저서 “미개 사회의 성과 억압 (Sex and Repression in Savage Society, 1930)”은 -한완상 교수의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1976년에 삼성 출판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데- 라이히 역시 이 책을 가끔 인용하고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멜라네시아에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살고 있던 트로브리안더 원시인의 성 생활을 오랫동안 추적하였다. (각주: 우리는 말리노프스키 외에도 모간 Morgan의 “원시 사회”,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권 그리고 국가의 기원」 등의 연구에서 두 가지 생활 사이의 관련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정에서 어른들은 옛날에 성행되었던 군혼 생활 (群婚生活)은 사라졌지만,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얼마든지 골라서, 그들의 자식이 보든 말든 간에 성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청소년 소녀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성행위에 대한 연습을 해도 좋았으며, 다만 어른이 성교할 때 그들은 머리를 땅바닥 아래로 내려놓아야 했다고 한다. (각주: 이는 수치심으로 인하여 성 행위 장면을 은폐하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에 어른들이 방해받지 않으려는 이유에서 내려진 조처였다. W. Reich: Der Einbruch der sexuellen Zwangsmoral, Hamburg 1972, S. 25f.).
라이히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이었다. 그 하나는 트로브리안더 원시인들에게서 남녀 사이의 질투심, 소유욕 그리고 노이로제 등의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이들 집단에서 결혼 지참금 (정확히 표현하면 결혼 지참물)이라는 풍습이 생겨남으로써, 모계 혈통 중심주의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가부장적 부권 사회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로브리안더 원시인들의 성생활에 관한 인류학적 논의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이히가 말리노프스키의 인류학을 바탕으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적으로 비판한 사항이다. 라이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가설을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사항으로써 비판하고 있다. (각주: 이어지는 내용은 라이히의 주장으로서, 다음의 책에서 계속 설명되고 있다. Siehe Reich: Der Einbruch der sexuellen Zwangsmoral, a. a. O., S. 120 - 124.).
첫째, 만약에 프로이트의 논리대로 성장한 자식들의 부친 살해 사건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 이어져 왔다면, 어떻게 인류가 존속될 수 있었겠는가? 원시 씨족 사회에서는 친아버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아이들 주위에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성인 남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부분의 경우 다른 씨족 출신의 사람이다. 따라서 백퍼센트의 근친상간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둘째, 프로이트의 논리에 의하면 부친 살해 후에 아들들이 죄의식과 후회로 인하여 여자들 (어머니 혹은 자매)과 성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 인구는 현저히 감소해야 했을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각주: 이는 아버지의 존재가 이중적으로 해명됨으로써 반박당할 수 있다. 가령 자크 라캉은 초자아를 구성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이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근친상간을 금하는 아버지는 스스로 이에 대한 법에 복종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적 아버지로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을 견지하고 있다. 원초적인 아버지는 아들과 같은 경쟁자를 추방시키고 모든 돈과 여자를 차지할 수 있었다. 숀 호머: 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 총서 2, 은행나무 2005. 111쪽 이하.). 셋째, 원시 씨족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질투심이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 감정 Ambivalenz”은 세월이 흐른 뒤에 부권 사회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넷째, 아들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부친을 살해한 죄의식 때문에 근친상간을 실행할 능력을 상실한다고 한다. 이로써 그후에 윤리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이란 그 자체 윤리적인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이로써 프로이트는 사건의 선후 관계를 뒤집어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다섯째, 프로이트는 원시 시대에 이미 행해졌을 법한 근친상간 행위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시 사회 사람들의 근친상간 행위는 신화학적으로 그리고 인류학적 답사로써 얼마든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년 남자들은 다른 씨족의 출신이기 때문에 자식들은 그들을 친아버지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근친상간”이라는 개념조차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섯째, 프로이트의 가설은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과 어머니와의 성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인류학 연구에 의하면 원시 씨족 사회에서는 모자 (母子)간의 근친상간은 무척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곱째,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의 범위를 (시대착오적으로) 현대적 의미에서의 가족 단위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에서는 가족이 문제되지 않고, 씨족 전체가 하나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약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은 생물학적 그리고 인류학적인 사실적 증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프로이트 및 그의 제자 로하임은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인류학 연구에 바탕을 둔 사실적 요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머릿속에서 추측해낸 사변적인 패러다임을 역사, 문화의 이론 등에 추상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주: 사회학적으로 볼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성의 제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과 대중 심리, 오세철 외역, 88쪽.).
4. 프로이트의 문화 이론과 라이히의 새로운 윤리
우리는 앞장에서 문화에 관한 프로이트의 입장을 비록 개괄적으로나마 설명하였다. 프로이트가 내세우는 문화의 개념은 충동의 억압과 포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비도의 억압은 오이디푸스가 느꼈던 죄의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즉 오이디푸스는 부친 살해에 대한 죄의식과 후회의 감정을 지녔을 뿐 아니라, 되찾은 여자 (어머니)와의 성 관계에서도 성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각주: 오이디푸스는 실제로 전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의 여자가 바로 친어머니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E. Bloch: Das Prinzip Hoffnung, Gesammelte Ausgabe, Bd. 5, Frankfurt a. M. 1985, S. 60.). 충동이 억압되고 포기된 근본적인 이유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이디푸스의 죄의식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죄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 원칙” 대신에 “현실 원칙”을 강요하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 및 문명 역시 리비도를 억압하는 “현실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어떤 개인이 자신의 충동을 억압하면, 그럴수록 히스테리의 현상 및 노이로제의 발병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문화 역시 리비도의 억압과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 편협하고, 암울하며, 파괴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각주: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화의 불안, (김종호 역), 서울 1974, 112 - 124쪽.).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문화 이론은 정신 병리학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고 한다. 라이히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만약 프로이트가 옳다면, 다시 말해 성의 억압과 충동의 포기가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낳고 노이로제를 창출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노이로제의 예방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각주: W. Reich: Der Einbruch der sexuellen Zwangsmoral, a. a. O., S. 16.).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노이로제라는 병리 현상은 문화의 발전에 대한 필요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히에 의하면 문화란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며, 때로는 이 두 가지의 요소들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성취된 욕망은 건강한 문화를 창출하고, 성취되지 않은 욕망은 부정적인 문화를 잉태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스테리 및 노이로제 환자의 대부분에게서는 의지력 및 자신감이 현저하게 저하되어 있으며, 외부의 현실과 단절감을 느낀다. (각주: W. Reich: Charakteranalyse, Köln 1971, S. 419f.).
이에 비하면 성적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자의식과 의지력으로 충만해 있다. 그렇기에 그가 수행하는 일의 성과는 자기 자신의 계획에 거의 상응한다. 따라서 건전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라이히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성취된 욕망이지, 성취되지 않은 욕망이 아니다. (각주: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 감정 Ambivalenz”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애모의 감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증오로 변화될 수 있고, 증오는 사랑으로 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정서적 모순 관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모순된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정서 상태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사랑과 미움의 동시적 감정”을 통해서 강박 관념과 원시적 금기의 상태를 설명한 바 있다.).
라이히는 ‘인간의 충동은 전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라는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을 따르면서, 충동 (Libido)의 현상적 특성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하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요구 사항을 반영하고 있는 일차적 충동이요, 다른 하나는 시민 사회의 윤리에 의해 규범화된 부차적 충동이다. 특히 후자는 억압, 불만족 등으로 나타나는 반사회적이고 병적인 충동이다. (각주: W. Reich: Die sexuelle Revolution, a. a. O., S. 43f.). 원래 인간의 윤리는 사회를 방해하는 사악한 충동을 억누르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사악한 충동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일차적 충동마저 함몰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이히의 견해에 의하면)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충동을, 윤리에 의해서 생산된 부차적이고 반사회적인 충동으로부터 철저히 구분시켜야 한다. 라이히는 자유로운 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며, 그러한 충동이 완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충동이 상황에 따라서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되고, 어떤 다른 시점의 경우에는 반사회적인 충동으로 변화된다는 점이다. 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하여 라이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떤 어린아이가 한두 살 나이에 침대에 오줌을 싸고, 자기의 똥으로 장난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행위는 전생식기 시기의 성의 자연스러운 발전 단계에 속한다. 이 시기에 똥으로 장난하는 행위는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린아이를 벌하는 것은 그 자체 심한 형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14세 된 아이가 자신의 똥을 먹거나 그것으로 장난하면, 이는 이미 부차적인, 반사회적인 병적 충동이 아닐 수 없다. 당사자는 심한 벌을 받을 게 아니라, 병원으로 송치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 같은 책, S. 46.). 따라서 어떤 특정한 충동이 일차적 충동이냐, 아니면 이차적 충동이냐? 하는 물음은 주어진 특정한 상황 및 인간의 보편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충동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구조에서 비롯한다.
라이히는 시민 사회에서의 윤리가 성 경제학적인 윤리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시민 사회에서의 윤리적 규범화는 부차적인, 반사회적인 충동을 강화시키고, 성 경제학적인 새로운 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욕망을 독립적으로 조절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즉 부차적 충동 및 이로 인한 윤리적 강요 (그리고 윤리적 강요 및 이로 인한 부차적 충동)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하며, 이를 성 경제학적인 자기 조절로써 대치시키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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