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형제들의 제각기 다른 특성: 작품은 어떤 이념을 담고 있는 장편 소설입니다. 게다가 카라마조프 가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한적 상황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아버지로서의 인간이 두 명 등장합니다. 표도르 카라마조프 그리고 스타레크 초시마가 바로 두 인물입니다. 표도르가 생물학적인 아버지로서, 출산과 죽음의 양극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스타레크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아버지로서 희생과 부활의 양극적 특성을 드러냅니다. 스타레크 초시마는 나중에 언급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무신론 사상을 개진하는 데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표도르의 세 아들은 제각기 인간의 세 가지 다른 본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드미트리의 삶은 열정의 특성을, 이반의 삶은 사고의 특성을, 그리고 알료샤는 창조적인 의지를 보여줍니다. 세 명 모두 카라마조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천성과 반대되는 요소를 지닌 셈입니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인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유혹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 형제들은 동일한 비극적 갈등 (아버지에 대한 증오)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야 하며, 스메르쟈코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범죄 (아버지 살인)에 각자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들입니다.
7. 세 형제들의 연인들: 세 형제에게는 제각기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각자 고유한 특성을 지닙니다. 이반은 고집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의 연인, 카테리나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입니다. 드미트리는 색정적이지만, 그의 연인 그루젠카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알료사와 리자는 근본적으로 치유의 기적이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들은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신앙심이 무척 강합니다. 등장인물 모두 제각기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있습니다. 예컨대 무신론 사상을 대변하는 이반은 이중인격을 드러내며 살아가며, 드미트리는 선술집과 골목을 배회하며 시정잡배처럼 흥청망청 살아갑니다. 알료샤는 리자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원에서 조용히 고립된 생활을 영위합니다.
8. 자기기만과 자기 파괴의 상: 소설의 핵심적 줄거리는 형제들의 삶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나드리프nadryv”라는 비극적 갈등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드리프”는 “찢는다.”라는 뜻을 지닌 러시아어의 동사 “나드리바트nadryvat”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 자신을 파괴시키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나드리프의 갈등은 고유한 개인에게 의도적으로 폭력을 가하고 운명을 짓밟으려는 잔악한 행위를 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료샤는 어떤 황홀의 상태에서 어떤 가치가 전도된 세계를 멀거니 바라봅니다.
가치가 전도된 세상은 비정하고 파렴치한 이기주의자들의 현실이 아니라, 기독교의 믿음에 의해서 순화되어 있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가 바라는 숭고한 세계에 대한 비유적인 상입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마치 그림자를 쫓듯이 믿음을 선택합니다. 이에 비하면 드미트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쾌락을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데, 어느 날 어떤 불행한 아기에 관해 꿈을 꾸는데, 이는 자신의 과도한 열정이 동정심으로 치환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9. 무신론자 이반: 언젠가 이반은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 재판관에 관한 전설을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설은 오로지 소설 전체의 틀 속에서 이해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중세 에스파냐에서 출현합니다. 그는 즉시 세인에게 알려지고, 종교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서 투옥됩니다. 백발의 노인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애쓰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노인은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에 대해 탄식을 터뜨립니다. 그는 만인을 유혹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재능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대신에 빵, 기적 그리고 권력 등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세상에는 인간의 불행과 고통만 창궐하고 있습니다. 종교재판관은 자기 자신을 반-기독교도라고 실토합니다. 반-기독교도는 멸시 당하는 인간을 위해서 지상의 천국을 건립하지만, 끝내 죽음을 불러와서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침묵을 지키며 그는 반기독교도의 입에 키스하고 자리를 떠납니다. 이반의 에피소드는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의 책 『안티크리스트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Solowjew: 75ff).
10. 이반의 무신론적 저항 (1):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서유럽의 기독교 교회가 잘못 발전되었으며, 로마 교황청이 실질적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속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이해됩니다. 둘째로 상기한 전설은 등장인물 이반 자신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반 자신이 품고 있는 동정심은 세상 누구와도 관련이 없고, 오로지 세상에 머물고 있는 자, 자신의 운명으로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반은 자신의 사고 속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깍두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셋째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했습니다. 즉 자유란 인간 내면 속의 신의 원칙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믿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반의 견해에 의하면 신의 원칙을 수행하는 인간의 고귀하고도 경건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11. 이반의 무신론적 저항 (2): 이반은 동생 알료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발 나를 올바르게 이해해다오. 내가 신을 받아들인 게 아니야. 신이 창조한 세계를 나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 이반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믿음 자체에 하자가 도사리는 게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신, 다시 말해서 인간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억압하며 결정짓는 창조주의 권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정신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지만, 창조자로서의 야훼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블로흐: 204). 우리는 이반의 이러한 주장에서 고대의 영지주의자, 마르키온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르키온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깊이 흠모했지만, 창조자로서의 야훼를 집요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예컨대 데미우르고스는 마르키온에 의하면 사악한 뱀 한 마리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적 내지 악마라는 것입니다.
기실 구약성서가 알파의 믿음이라면 신약성서는 오메가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가 태초의 말씀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요한다면, 후자는 세계의 종말, 즉 묵시록적 변화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 이반은 마르키온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답습하여 모든 권위를 휘두르는 데미우르고스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적어도 기독교가 하나의 권위적 체제로서 창조주의 권력에 굴복하는 한 사악한 의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반의 지론이었습니다.
요약하건대 이반 카라마조프는 권위와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계 창조주를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스스로의 척도에 의해서 세워나가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자연과학적 무신론자, 야콥 몰레쇼Jacob Moleschott 그리고 루드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의 무신론과는 다른 각도에서 체제로서의 교회를 부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시론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의 입장은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를 닮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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