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a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서로박: (8)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4, 서문 (불워-리턴에서 무질까지, 19세기 말 - 20세기 전반부)

필자 (匹子) 2025. 1. 16. 09:21

11. 길먼의 여성주의 유토피아 (1915): 여성주의 유토피아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드물게 출현하였습니다. 길먼의 작품 『여자들만의 나라Herland』는 아마존 여성 공동체가 추구하던 전투, 경쟁 등을 지양하고, 여성들의 평화, 협동 그리고 공존을 추구하는, 낙관적인 여성 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길먼은 20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생태주의에 근거하는 여성 평화 운동의 유토피아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작품은 여성다움에 관한 편견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합니다. “여성다움”은 길먼에 의하면 여성으로 하여금 숙명적인 생활 방식을 이어가게 만든다고 합니다. 본 장은 여성 차별, 여성 억압 교육 등을 추적하면서 여자의 나라에 관한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12. 프리오브라센스키의 산업 유토피아, 차야노프의 농업 유토피아 (1921): 프리오브라센스키는 전체적으로는 산업의 발전을 추구하는 소련의 정책에 동의하지만, 특히 전쟁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 위주의 정책 추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소련 사회는 전쟁 산업을 포기하는 대신에, 경공업과 같은 러시아 인민을 위하여 다양한 산업 경제의 도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차야노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련의 경제적 토대가 농업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이에 상응하는 자생적 농촌 경제의 발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의 농업 중심의 사회 구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 분석만으로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소련의 대부분의 지역이 자생적 농업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요약)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대아 유토피아: 이 장은 지금까지의 사회 유토피아의 특성과 한계를 요약하고, 유토피아 개념 그리고 주어진 현실적 정황을 전제로 하는 유토피아의 기능적 문제 등에 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문학이 20세기 이후에 활발하게 출현한 배경과 이유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개인 In-Dividuum”의 기능의 취약점 내지 하자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본고는 국가의 폭력, 21세기 생태계 문제 그리고 인구증가 현상 등을 고려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서로 아우르며 협동하는 대아 (大我) 유토피아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14. 자먀찐의 디스토피아 『우리들』(1921): 『우리들』은 디스토피아 문학의 서구적 위치를 점하는 작품입니다. 자먀찐의 『우리들』은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유일 국가”의 정치경제적 시스템을 설계하였습니다. 유일 국가에서는 개인의 존재 가치는 말살되고, 개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조차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두 개의 대립되는 요소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합니다. 그 하나는 엔트로피로 요약되는 강요된 행복을 요구하는 시스템과 관련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동력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는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이로써 엔트로피 그리고 에너지의 영원한 충돌은 변증법적 차원에서 이해되는데, 레오 트로츠키Leo Trotzki의 영구 혁명론을 연상시킵니다.

 

15.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32): 헉슬리의 작품은 독재자 그리고 과학 기술이 동시에 저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여지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근거한 물질문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행복과 사랑 등을 향유할 수 없도록 기능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미래의 전체주의의 국가 체제 그리고 인간 삶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과학 기술 등을 통해서 헉슬리가 개진한 인류 문화의 비극적 특징과 부정적 영향력 등을 밝히고 있습니다. 뒤이어 대작 『특성 없는 남자』에 나타난 유토피아의 특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로베르트 무질은 어떠한 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는 자율적 인간의 갈망 속에 도사린 가능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9세기부터 유럽인들은 더 나은 삶에 관해서 더 이상 열광적으로 갈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강하게 작용한 것은 경제력의 상승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어쩌면 망각의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찬란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체제안주적인 태도를 취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간에- 항상 실증주의자들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참되다고 믿는 자들은 처음부터 어떤 비가시적인 사항을 무시합니다. 이들에게는 눈앞의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며,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변화과정은 하나의 허상으로 이해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증주의자들은 비가시적이고 통시대적인 변증법 그리고 이와 결부된 학문적 형이상학을 처음부터 폄하하고, 오로지 인성과 자율적 삶에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합니다. (Ernst Bloch: 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 Frankfurt a. M. 1985, S. 467.) 이 점에 있어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표방한 논리 실증주의는 놀랍게도 디오게네스Diogenes의 학문적 회의주의와 절묘하게 결착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오늘날 대부분 자연 과학자들의 세계관과 접목되어, 인문 사회과학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요약하건대 눈앞의 현상에만 집착하는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더 나은 삶에 관한 인간의 꿈은 그야말로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처럼 허황되고 뜬금없는 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5부작 가운데 제 4권은 특히 1900년 전후에 출현한 일련의 디스토피아의 문학을 천착한다는 점에서 많은 교훈을 전해줍니다. 막강한 국가의 폭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그리고 세계대전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삶에 여전히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네 가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70년 이상 지속되는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사의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피맺힌 결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넘어서, 그 자체 사상사적으로 동서양의 이원론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냉엄한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독점 자본주의 생산 양식과 직결되는 현실적 상황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전락하여 미래의 삶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셋째로 개개인의 삶을 옥죄이는 국가 기관의 횡포의 예는 한반도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권력 기관의 핍박으로 인하여 힘없는 개인의 생존권과 인권이 끊임없이 침탈당해온 것을 고려해보세요. 넷째로 일제 강점기에서 나타난 경제적 수탈과 민족에 대한 배반 등은 역사적으로 청산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계층 사이의 불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불신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네 가지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J, “예언자는 고향에 머물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Propheta non valet in patria sua)”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면 지식인은 자신의 과업을 더욱 분명하게 인지한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예컨대 하나의 난제는 그것이 출현한 장소의 외부에서 더욱 명료하고도 객관적으로 인지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당면한 사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경우, 우리는 우회적 자세를 취하면서,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주어진 난제와 유사한 범례를 탐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4권은, 비록 간접적이겠지만, 어떤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본서가 정신사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기를 바라면서.

 

장산의 끝자락에서

필자 박설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