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역사 연구는 그야말로 자연과학 전반에 걸친 지식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과업입니다.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은 물론이고, 낯선 지역의 기후와 지질을 알아야 하며, 고고인류학과 민속학 고생물학 분야까지 탐색해야 가능한 학제적 연구 분야입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 – 1859)는 이 모든 것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섭렵해나갔습니다. 그는 1799년 6월 5일에 에스파냐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평생의 동료 에메 봉플랑Aimé Bonpland과 함께 신대륙으로 떠납니다.
40일 동안의 항해 끝에 두 사람은 쿠마나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후 중부와 남부 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지도를 작성하고, 광물과 동식물, 원주민의 삶 그리고 그들의 풍습을 탐구합니다. 모든 새로운 사물은 직접 보고 익히는 게 참다운 지식이라고 여깁니다. 여행을 마친 그들은 워싱턴에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을 만난 다음에 1804년 8월에 프랑스의 보르도로 돌아옵니다. 탐험은 거의 5년 동안 지속된 셈입니다. 처음에 훔볼트는 베를린에 잠시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가서 약 22년 동안 그곳에서 저술 작업에 몰두합니다. 1829년에는 시베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지나간 세계를 기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독일 작가, 다니엘 켈만 (1975 - )은 자신의 소설 속에 18세기 말의 장면을 멋지게 담았습니다. 『세계를 재다Vermessung der Welt』 (2005) - 이것은 “세계의 측량”이라고 번역되는데, 역사 소설에 속합니다. 이 책은 박계수씨의 번역으로 2019년 민음사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건이 소설로 형상화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를 생생하게 대하려는 독자는 이 소설에서 별반 얻을 게 없습니다. 왜냐면 소설은 가상의 문학적 현실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훔볼트는 1828년에 자연과학자와 의사 협회 주최의 17번째 모임에 괴팅겐에서 살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1777 - 1855)를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가우스는 책상에 앉아서 평생 연구에 골몰했고, 훔볼트는 평생 자신의 자연사 연구의 소재를 신대륙 등 세계에서 직접 탐험했습니다. 한 사람은 머릿속에서 암호를 풀어헤치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높은 산, 동굴 등을 뒤지며, 새로운 사물들을 접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육십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가우스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몹시 영리하다고 믿고,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김나지움에 보냅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가우스는 책 『대수학 연구Disquisituones Arithmetica』라는 놀라운 책을 탈고합니다. 하나 그에게는 자신의 책을 발간할 돈이 없습니다.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놀리고 돈벌이를 위해서 틈틈이 측량 기사로 일합니다. 나중에 그는 천문학과 물리학을 전공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방정식 이론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828년에 베를린 근처에 있는 산정에서 가우스를 만납니다. 훔볼트는 오래전에 신대륙을 탐색하였고,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수많은 책을 집필한 바 있습니다. 그는 사람 만나기를 즐기고,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향하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가우스는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가우스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게다가 멀리 떠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우스의 성격은 매우 변덕스럽지만, 은밀히 여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우스가 여자들을 만나서 로맨틱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홍등가에서 만나 성 도락을 즐길 뿐입니다. 이는 훔볼트와는 다른 생활습관입니다.
그런데 훔볼트와 가우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측량하는 일입니다. 가우스는 자신이 100년 뒤늦게 태어났더라면, 수학자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며 살 텐데 하고 푸념을 터뜨립니다. 그는 수학의 난해한 공식들을 학문 연구를 통해서 증명해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설정하지만, 우리는 결국 미래 사람들에게 광대로 비칠 뿐.”이라고 말합니다. 가우스의 마누라는 남편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알랑거리는 자는 결국 비겁자에 불과해요.” 가우스는 자신의 고향, 괴팅겐에 칩거합니다. 혁명전쟁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에 가담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사는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이한 숫자만이 가우스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이에 비하면 훔볼트는 새로운 무엇을 모조리 알고 싶어 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에 관한 학문적 가설들을 설정하고 실제 현실에서 이에 대한 범례를 찾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의 가설들 또한 주어진 현실과 마찬가지로 변모를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사물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훔볼트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측정하는 훌륭한 이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를 양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독자는 가우스와 훔볼트 가운데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두 인물의 비교에 있습니다. 독자는 훔볼트라는 인물을 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공식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마치 멍청함 내지 우둔함에 대한 투쟁 작업에서 활용될 수 있는 다목적 무기일지 모릅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멍청함 내지 우둔함은 가우스에게는 결코 자신의 학문적 소재가 될 수 없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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