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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2) 학문의 따로국밥,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

필자 (匹子) 2024. 11. 27. 06:28


오성은 여러 법칙을 형성하게 하지요.”하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학문적 작업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어디서 일하든 상관없습니다. 그게 질퍽거리는 화산 속이라 하더라도 그는 뛰어들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훔볼트의 말을 듣는 가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가우스는 수학자로서 해외여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해외여행이 사치스러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건 칸트의 허튼 생각입니다. 오성은 어떠한 것도 산출해내지 못해요.” 작가는 이러한 식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려고 소설을 쓴 것이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켈만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째서 그는 과거의 학자 두 사람을 예로 들었을까요? 작가의 멋진 서술 방식은 매혹적이고, 과거 삶에 관한 에피소드, 가우스와 훔볼트의 조수, 봉플랑이 저지르는 에로틱한 행각 등은 약간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소설의 주제는 명징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의 의미를 던져주었습니다. 켈만의 소설은 오늘날 본연의 가치를 잃은 학문의 근본적 방향을 숙고하게 합니다. 산업 혁명은 기술 발전의 신호탄이 되었고, 에너지 개발은 강대국의 발전과 세계 대전 그리고 급기야는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를 촉진했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오늘날 수많은 연구 발표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기술 발전을 악용하는 정치가의 농간 때문이지요.

 

산업 혁명 이후로 정신과학은 자연과학과 분화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은 엄밀히 말해서 기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가령 열대 지역의 자연사를 연구하는 것은 자연과학, 민속학 그리고 야생에 도사린 놀라운 진리를 깨우쳐 나가는 탐험입니다. 그것은 과학 기술을 통해 추구하는 경제적 이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문은 어떻게 치부되고 있습니까? 인문학자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고, 자연과학자의 연구 결과는 실용적으로 활용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양날의 칼로 활용되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물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세계의 측량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 인간이 알지 못하는 자연의 이해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문명과 야생의 교류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측정될 수 있습니다. 부갱빌의 타히티 탐험이라든가 훔볼트의 자연사 연구는 이른바 자본가의 일방적 이익 추구와는 의향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훔볼트는 야생에 대한 서양의 일방적 관점, 다시 말해서 유럽 중심주의의 시각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대 우림 지역을 탐색함으로써 서구의 자연과학의 시각을 눈 뜨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원시적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가르침을 선사하는지를 밝히려고 했습니다. 요약하건대 문명과 야생은 상호 교류를 통해서 상호 발전되어야 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 - 1859)

 

많은 서양 사람들은 문명과 야생의 교류와 협력 작업을 무시하고, 경제적 문화적 이득이라는 일방적 관점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는 식민지 쟁탈, 세계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탄소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여 생태계 파괴 현상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자연사 연구는 문명과 야생을 공동으로 되살리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서양인은 열대 지역에서 그들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도를 찾고, 원시인들은 문명인과 소통하면서, 서구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연사 연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 켈만은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첫째로 그는 훔볼트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어떻게 협력했는지 전혀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훔볼트의 자연사는 열대 아메리카를 함께 탐험했던 동료 봉플랑 그리고 아메리카의 혼혈 학자들과의 협력 작업이 없이는 어떠한 결실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훔볼트는 아메리카 여행 이후에 프랑스 파리에서 22년 동안 머물면서 프랑스어로 저술 작업을 계속했는데, 다니엘 켈만은 이를 작품에서 무시했습니다. (이종찬: 훔볼트 세계사 自然史 혁명, 지식과 감정 2020, 77쪽)

 

소설 작품에는 훔볼트의 22년 동안의 프랑스어 저술 작업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가우스와의 만남으로만 향할 뿐입니다. 이로써 작가는 학문의 분할되어가는 과정 내지는 사회로부터 학문이 서서히 소외되어가는 과정만을 피상적으로 서술할 뿐입니다. 요약하건대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아메리카, 에스파냐, 프랑스, 프로이센” 사이에서 학문 융합의 가교를 놓으려고 불철주야 노력했는데, 작가는 이러한 노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서구와 신대륙 서구 문명과 야생의 삶 등으로 비교되는 자연사는 오로지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학문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대부분 학자는 서재에 처박혀 공식을 골똘히 무언가를 사변적으로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들은 모든 질문과 대답을 추상적으로 제기하고 논평하곤 합니다. 서로 모여서 소통하고 토론하며 의견을 주고받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언젠가 박노자 교수는 한국의 교수 사회를 마치 중세의 기사가 폐쇄적으로 머무는 성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문 행위가 마치 물 흐르듯이 대학의 담과 국가의 담을 허물면서, 상호 교류될 수 있을까요?

 

참고문헌

- 박은주: 시간은 지나가고 공간은 구부러져 있다,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나타난 굴절된 현실상과 카오스에 대한 문학적 변호, in: 독일 언어문학, 67, 2015, 175 - 203.

- 배기정: 독일 문명 비판, 독일문화사에서 본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 외국문학 연구, 36, 2009, 171 - 194.

- 유봉근: 다니엘 켈만의 펙션 "세계를 재다"에서 과학주의의 사회 실험과 통합적 지식의 문제, 코기토, 67, 2010, 193 - 220.

- 유현주: 오리노코 강의 바이마르 고전주의자: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나타난 상호문화성, in: 세계문학 비교연구, 42, 2013, 341 - 364.

- 이지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코스모스 연구 1,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 in: 독어독문학 141, 2017, 25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