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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옐리네크의 '오 황야여, 그곳의 보호여'

필자 (匹子) 2024. 11. 11. 11:48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산문, "오 황야여, 그곳의 보호여 Oh Wildnis, oh Schutz vor ihr"는 1985년에 발표되었다. “반 고향 소설”에 해당하는 옐리네크의 소설은 고향의 영혼을 담은 근원 신화 내지는 자연 신화 등을 강한 어조로 풍자하고 비판한다. 사실 80년대 오스트리아에서는 상기한 극우 보수주의적인 경향이 하나의 유행처럼 등장한 바 있다. 이로써 옐리네크는 네스트로이 (Nestroy), 카 크라우스 (Karl Kraus) 그리고 토마스 베른하르트 (Th. Bernhard) 등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사람들의 소시민 근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옐리네크의 텍스트는 숨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거침없이 자연을 묘사하고 있는데, 작가는 문학적 서술로서 주어진 고향으로서의 상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은 문학, 철학, 파시즘 이데올로기, 매스콤, 관광 산업 그리고 환경 보호 등에 의해서 생산된 메타퍼나 다름이 없다. 자연의 이러한 해체 과정은 자연과 풍경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점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관점은 노동, 문학 작품 그리고 소유를 지칭하는데, 이것들은 스타이린 지역의 벌목공 에리히를 통해서 서술되고 있다. 에리히라는 인물은 잡다한 주변 묘사 속에서 불분명하게 서술되고 있다.

 

소설의 첫 번째 부분은 “외부적 일상 - 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여기서 에리히는 벌목공이자, 자신의 아이를 마구 때리는 몰상식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이로써 작가는 주인공 에리히가 자연을 어떻게 인지하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말하자면 에리히는 장편 소설 󰡔사랑하는 여자들󰡕 (1975)의 속편 이야기의 주인공인 셈이다. 마누라로부터 버림받은 노예적 인간, 에리히는 자연 속에서 벌목공으로 살아가나, 소외되지 않은 전원적 자연의 상태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에리히에게는 더러운 대상이자, 파괴적인 폭력으로 이해될 뿐이다. 텍스트는 방랑이라는 문학적 모티브를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어떤 바람 부는 정상으로 향해” 서서히 올라간다. 그러나 그에게 들이닥치는 것은 산업 재해이다. 에리히는 넘어지는 나무 둥지에 치여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한다.

 

두 번째 부분은 “서술을 위한 이야기는 없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어느 높은 산 속에는 나이든 여류 시인, 아이히홀처가 살고 있다. 그미는 마을을 떠나 자연을 예찬하는 시를 쓰거나, 회고록을 쓰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그미의 시작품들은 수준 이하의 천박한 서정을 담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미의 죽은 애인은 유명한 철학자라는 데 있다. 애인은 여성을 학대하는 잔인한 남자였는데, 나치를 옹호하는 철학자로서, 사람들 사이에 명성을 얻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니체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상을 답습하고 있다.

 

작가 옐리네크는 아이히홀츠 (Eichholz)를 “떡갈나무를 옹호하는 여자 (Eichhölzerin)”로 은근히 단정한다. 떡갈나무란 원래 아리안 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나무가 아닌가? 여류 시인, 아이히홀츠는 남자와 함께 보낸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잘 기억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속으로는 여성을 학대하고, 인종차별적이며, 무척 잔악하다. 그미는 회고록에다 이러한 내용을 거짓없이 묘사하려고 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죽은 철학자의 제자 한 사람은 출판사 편집자들과 함께 아이히홀츠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도록 방해 공작을 펴는 일이다. 작가 옐리네크는 이로써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풍토 역시 나치 철학을 옹호하는 피와 토양을 강조하는 남자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폭로하려고 했다.

 

소설의 세 번째 부분은 “바깥. 밤 - 놀라운 산문! 가치 있는 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소설은 토지 소유자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예컨대 거대한 백화점 주인과 손님들 그리고 유명한 여지 배우, 독일인 경영자 그리고 정치가들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들은 자연을 호화롭고도 잘 보호받은 사냥터로 개발하게 한다. 주위에서는 자연 보호자들이 나타나, 자연의 황폐화를 경고하고 있다. 재벌이든 환경 보호자들이든 간에 모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유 관계를 깊이 성찰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 에리히는 어느 경영 여자의 침실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해프닝을 겪은 뒤, 그미에게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즉 결국 수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국립 내지 민간 산지기가 바로 그 일자리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거대한 바퀴 속에 묻은 톱밥”과 다름이 없이 살아가다가, 우연히 어느 산지기의 총에 맞에 사망한다.

 

이렇듯 옐리네크는 다음의 사항을 예리하게 고발한다. 즉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고향과 자연을 찬양하지만 그 속에는 파시즘이라는 잔악한 태도가 은밀히 용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옐리네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광고이다. 예술도 광고이다.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역시 광고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