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블로흐와 부버

필자 (匹子) 2023. 10. 12. 09:22

사진은 1961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부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유토피아에 어떤 적극적 참여 정신을 부여한 사람은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였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어떤 비판적 결함을 추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을 의도했다는 점은 블로흐, 벤야민 그리고 브레히트 등의 경우와 유사하다. 마르틴 부버가 중시하는 것은 실천이라는 주관적 영역이다. 개개인이 자유와 평등의 삶을 실천하려는 뜻은 역사적 관련성이라는 객관성에 대항하는 새로운 현실의 장을 제공한다. 실천하는 행위는 역사성의 객관주의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그것은 부버에 의하면 "사행 철학 Tathandlungsphilosophie"을 내세운 피히테주의와 다름이 없다.

 

부버의 사상은 종교에서 출발한다. 마르틴 부버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토대를 설정하고, 두 유형의 신앙인들이 상대방의 믿음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은 제각기 상대방으로부터 새로운 무엇을 배우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나타나는 것은 “너와 나”의 사상이다. 모든 견해는 동등하고, 제각기 유효하다. 너와 나는 동등한 관계 속에서 모든 지배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인으로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프로이트의 그것과는 반대된다. 프로이트가 개인의 주체 속에 갇힌 충동적 존재에서 모든 문제를 밝히려고 시도한 반면에, 부버는 충동 대신에 윤리를, 그것도 사회적 윤리와 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적 종으로서의 인간 정신을 강조한다. 부버는 프로이트의 장소에 의존하는, “토피아 (Topie)”와 같은 심리적 동력을 거부하고, 시간에 의존하는, “유토피아 (Utopie)”와 같은 심리 중심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부버는 유대인 억압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유대인만의 저항정신을 고취시키지는 않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시오니즘의 희망 뿐 아니라, 협동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랍인을 추방시키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에 반대하였다.

 

1950년 부버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좁은 길Pfade in Utopia. Über Gemeinschaft und deren Verwirklichung.』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나중에 『유토피아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이 책에서 부버는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자본주의는 부버에 의하면 개개인을 고립시키며, 대화를 단절시키게 만든다. 이로써 인간 삶은 공허하고, 궁핍하며, 황폐화될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부버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나타날 사회주의 사상이지만, 어떤 자발적 사회주의가 이에 대항할 수 있다고 한다.

 

부버는 역사적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완벽하게 올바른 사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 역사가 어떤 필연적 내용으로 확정되어 있다면, 상기한 이성적 의지라든가 이상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제반 공약 등이 아무런 효력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부버는 마르크스주의 속에 이상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역사 과정의 필연적 진행 형태를 고찰하면, 다시 말해서 경제 발전의 토대를 살펴보면, 혁명적 전복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경제학의 학문적 대상은 경험적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미래를 선취하는 지식으로서의 유토피아는 단순한 경험적 영역으로부터 일탈되어 있다. 유토피아가 마르크스 연구에서 제외되어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헤겔은 역사의 사상가이며, 투쟁의 변증법적 전복의 과정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미래란 그에게는 스치는 바람이며, 마치 왕겨와 같은 무엇에 불과했다. 헤겔은 비록 노동을 통해서 세계가 변화된다고 믿는 사상가였지만, 자유에 대한 분명한 시각 없이도 얼마든지 철학을 행할 수 있다고 믿던 이론가였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노동은 헤겔에게는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족쇄 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헤겔은 이른바 완전한 세계라는 건물을 표방하는 정태주의자였으며, 그저 자유와 미래를 건설하고 허무는 장인들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마르틴 부버는 과정의 사상가, 헤겔 그리고 필연적 사회주의 사이에 도사린 어떤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였다. 혁명의 집단은 부버에 의하면 교사 없이 이행되는 새로운 교육의 거대한 학교였다. 부버는 혁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노동의 새로운 조직 형태, 사회 형태, 즉 마르크스주의 속의 유토피아적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부버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이후에는 자유의 나라, 국가와 분업이 사라진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부버는 모든 유토피아의 사고를 종말론의 세속화된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종말론의 전통적 유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그 하나는 예언적 종말론으로서, 바람직한 무엇에 대한 준비 행위 내지 준비 자세를 주창한다. 다른 하나는 계시의 종말론으로서, 바람직한 무엇이 이미 사라졌다고 간주한다. 계시의 종말론은 부버에 의하면 순수 유토피아와 동일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서의 실현과 다른 차원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예언적 종말론은 구체적 유토피아로 작용할 수 있다. 계시의 종말론에 의하면 바람직한 무엇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은 목표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지나간 목표는 개방된 분명한 언어로 기술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은 실현을 위한 모든 중개의 방법론들을 처음부터 차단시킨다. 실현과 무관한 순수한 이상으로서의 유토피아는 칸트가 말하는 순수 이성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철학에서 언급하는 통각 (統覚, Apperzeption)의 개념과 관련되는 무엇이다.

 

마르틴 부버는 비록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블로흐, 벤야민 그리고 브레히트처럼 유토피아가 완전한 실현의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 사상가에 속한다. 순수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은 부버에 의하면 반드시 순수 유토피아를 통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언적 종말론은 계시의 결단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계시의 종말론은 스스로를 준비하는 임의적 상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순수 유토피아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는 비판 행위의 맨 앞부분에서 변증법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다.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부버가 마르크스의 독창적 이론을 마르크스주의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게 그 사항이다. 부버가 비판한 것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역사적 필연성만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사상,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부버의 견해에 의하면 지극히 반유토피아적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역사적 결정론이 소련에 정착된 것일까? 그것은 소련 혁명가들이 법칙성만을 강조하고, 일체의 역사 발전의 변화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카 넥트 (Oskar Negt) 그리고 허버드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등도 이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의 논거는 당면한 현실만을 고려한 경험론에 입각해 있다.  역사적 결정론과 관련하여 부버는 자유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자유란 어떤 완전히 결정되고 예정되지 않는 조건들의 관련성 내에서의 동기이다.”

 

부버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찬양하면서, 어떤 순수한 주의주의 (主意主義)의 결론으로서가 아닌, 주의주의의 사회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입된 법칙 숭배주의를 부정하고, 역사 속의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부버의 가르침은 경향성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부버는 한 가지로 확정된 목표로 향한 정치적 행위를 타파하고, 감추어진 경향성을 발견하라는 요망으로 요약된다. 부버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삶 그리고 자유의 사회적 가능성을 찾으려는 유토피아였다. 부버의 유토피아는 거대한 조직, 훈련, 전체에 대한 개인의 예속 등으로 관철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에른스트 블로흐 역시 “역사적 자동주의 der geschichtliche Automatismus”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부버의 견해에 동조한다. 루카치에 대한 블로흐의 다음과 같은 충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단은 결국 목표를 착색시키고, 그것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문제는 부버에게 도사린 아나키즘사상 속에 있다. 블로흐 역시 부버와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사회주의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이론 내에 국가의 유토피아적인 자유로운 기능이 첨예하게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과 변모 가능성은 아나키즘의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소련 초기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아나키스트와의 제휴를 거부하였다. 마르틴 부버는 중앙집권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면서, 지방분권적 아나키즘을 표방하였다. 그의 아나키즘적 유산은 이스라엘의 농업 코뮌 운동인 키부츠 (Kibbuz)에서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고찰할 때 부버의 지방분권적 입장은 중세의 형제조합과 같은 낭만적 진부함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버와 블로흐의 사상을 비교해보자. 부버는 유토피아의 기능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사고로 규정하였다. 이는 그의 주의주의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부버는 유토피아를 사회 영역으로 축소화시키면서, 어떤 우주를 포괄하는 종말론으로부터 구분한다. 부버가 인간 이성이 갈구하는 무엇을 주어진 현실에서 찾으려고 하는 한, 부버의 사상은 블로흐의 그것과 근친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부버가 신앙인, 마르크스주의의 적대자, 조합의 대변자라면, 블로흐는 무신론자, 마르크스 추종자, 국제 노동운동의 대변자이다.

 

그럼에도 부버와 블로흐는 인간이 갈구하는 보편적 의향을 가장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현실적 관련성, 다시 말해서 지금, 이곳의 형이하학적 구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연의 나라에서 자유의 나라에로의 이행은 다만 아직 종결되지 않은 과정적 질료에 터전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멀다고 생각한 극단적 미래와 자연 그리고 예견과 질료는 역사적 변증법이라는 유물론의 정해진 토대 속에서 일치하게 될 것이다. 질료 없이는 현실적 예견의 토대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현실적 예견 없이는 질료의 지평도 파악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부버가 이 말을 듣게 되면, 블로흐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