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박설호: (5) 새로운 물질 이론 그 의미와 방향

필자 (匹子) 2023. 5. 29. 16:12

(앞에서 계속됩니다.)

 

7. 나오는 말

 

새로운 물질 이론의 잠정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첫째로 아직도 물질의 윤곽, 다시 말해서 물질의 경계가 명확하게 간파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원칙적으로 객체의 경계를 거부합니다. 왜냐면 물질은 고정된 명사적 고체라기보다는, 자력(自力)에 의해서 유동하는 동사적 에너지로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바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그 주위에 하나의 선을 지니지 않는다. 선은 인간의 심리적 구상의 상에만 그어져 있을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양자 물리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체성이 아니라, 파장의 움직임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러웨이는 이른바 ”회절diffraction“이라는 물리적 현상에 주목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파장으로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윤곽만 흐릿할 뿐, 물질의 경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물질의 ”기체(基體, Substrat)“롤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질을 어떤 ”개폐성의 보호막“을 지닌 (명사적 특징과 동사적 특징을 동시에 지닌) ”동명사의 존재“로 파악해야 할지 모릅니다.

 

둘째로 새로운 물질 이론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인식론적 구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물질을 인간 그리고 비-인간으로 양분하면서, 이른바 단절된 두 영역 사이의 관계성 내지는 내부 작용을 강조합니다. 세계는 인간 그리고 비-인간으로 구분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양단(兩斷)의 특징은 차제에는 양단(兩端)이라는 상호적 기능으로 변모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양단(兩端)이란 양 끝을 균형 잡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라투르는 ”행위소actant“와 네트워크 사이에서 출몰하는 “하이브리드hybride”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바라드는 “양자 현상으로서의 얽힘”을 거론했으며, 해러웨이는 자연과 인간을 통합한 “공생적 존재symbiont”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바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물질 이론의 논의에서 불필요합니다. 왜냐면 물질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제인 베넷이 주장한 바대로 움직이는 존재이자 에너지 자체입니다. 가령 혜강 혜한기崔漢綺에 의하면 태초에는 신이 아니라, 태극이 존재했는데, 이는 기(氣)의 움직임으로 발전하거나 약화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합니다. 기는 한마디로 생명체와 비-생명체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추적한 바 있는- 생명체를 생동하게 하는 오르곤Orgon의 흐름일 수 있으며, 나아가 비-생명체의 움직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의 움직임은 최한기에 의하면 “운화運化”로 명명되는데, 물질의 휴지와 변화, 생성과 사멸을 추동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요약하건대 기의 사상이야말로 물질 이론의 논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근시안적 인식을 넘어설 수 있는 자양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물질 이론을 고려할 때 “토본주의土本主義”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비판의 방향을 어디로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방향성 내지는 새로운 물질 이론이 마주쳐야 할 반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물질은 역동적으로 순환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기괴한 아상블라주를 형성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 자체가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존재라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묘혈을 파는 파우스트의 운명이 극복될 수 있을까요? 지금 여기의 물질적 아상블라주는 인간에게서 모든 우주적 특권을 빼앗으면서, 어떤 불가항력을 안겨주는 것 같아서, 도덕적 인간이 지녀야 하는 “책임의 원리”(Hans Jonas)마저 깡그리 포기하게 할 정도로 위협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물질 이론은 권력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동시에 사회 규범적 한계를 넘어서 생태학과 지질학의 관점을 포괄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 그리고 비-인간 사이의 행위자 사이의 동등한 위상은 새로운 물질 이론을 통해서 중요한 이슈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원시적 사고로 인식되던 애니미즘의 사고는 오늘날 복원되어야 합니다. 가령 페티시즘을 저열하게 여기는 문명인의 합리적 태도는 오늘날 수정되어야 합니다.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북아메리카의 원시인들에게는 “치유와 회복력을 지닌 약”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생태 의식 속에 편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제인 베넷은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사물의 활력"이라는 테제를 내세우는데, 이 경우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문제들이 예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될지, 혹은 사회적 영역의 일부가 될지, 새로운 물질 이론이 공개적으로 어떤 식으로 이와 마주치게 될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더 나은 사회적 삶을 갈구하는 유토피아의 동인이 남아 있다면, 예술 또한 자신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인류세의 모든 아름다움과 기괴함, 그 역동적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미적으로 표명해 나가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은근히 표출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예술가들이기 때문입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