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박설호: (4) 새로운 물질 이론 그 의미와 방향

필자 (匹子) 2023. 5. 27. 11:32

(앞에서 계속됩니다.)

 

5. 표상주의에 대한 비판

 

일부 물질 이론가들은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에 관해서 열렬한 토론을 벌였는데, 논의의 쟁점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연구 방법론 그리고 학문적 객관성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가령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후기 구조주의의 접근 방식에 관해서 논평하고, 1990년 이래로 제기된 객관성의 개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일방적인 인식론적 사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Sex“이란 버틀러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적 수행성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수행성은 물질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물질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관점과는 다른, 어떤 생명체 내지는 무기물과 결부되는 새로운 관점을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새로운 물질 이론은 페미니즘이 주도적으로 지향하는 급진적 구성주의라는 후기 구조주의의 접근 방식 내지는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적 표상주의로부터 비판적 거리감을 취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다의성의 이원론이 문제로 제기됩니다. 가령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론적 구분을 상정해 보기로 합시다. 단순한 이미지 그리고 기의, 재현 또는 사회적 구성 등을 고려한 때 서로 대비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는 남성중심주의라는 통상적 기의가 첨가된 잘못된 이원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진리는 스스로 표현되는 무엇으로 인지될 뿐이지, 존재 그리고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으로 인지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가령 남성에 대한 지각과 여성에 대한 지각을 비교해 봅시다. 남성에 대한 지각은 남성이라는 힘을 전제로 인지됩니다. 다의성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의 이원론적 틀 안에 갇힌, 부정적 특징에 의해 처음부터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표상주의의 사고에는 어떤 통상적 관점에 의한 착각의 오류가 은밀하게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한 가지 사항이 분명해집니다. 즉 새로운 물질 이론은 “물질의 상투적 특징”을 집약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것을 분산시키고 와해시킨다는 사항 말입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의 이론적 논거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페미니즘의 논제를 뛰어넘지만, 지금까지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타난 이론적 토대를 더욱더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물질 이론이 어떤 “종결된 사항으로 확정”되거나, “사변적 개방성”을 계속 활성화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존재 내지는 존재론이 근본적으로 지식 내지는 인식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항입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무엇보다도 객체 내지는 객체들 사이의 관계성을 중시합니다. 그것은 21세기 시대에 인정받을 수 있는 혁신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는데, 이는 정치권력을 분산시키고 책임의 논리 등을 실천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혁신적 존재론이란 해러웨이에 의하면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고 명명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자연과 문화 사이의 횡단성, 즉 상호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론의 상호 관계성은 자연과 문화를 근본적 대립으로 고찰하는 종래의 구조주의적 접근 방식과는 정반대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러웨이는 ”자연 문화“ 내지는 ”문화 자연“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개념 사용을 권고합니다. 이러한 권고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원론적 대립을 지양하고, 두 가지 영역 사이의 연결망을 인정하자는 자세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긴급하게 채택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위상을 낮추는 부단한 윤리적 노력일 것입니다. 해러웨이는 인간 존재를 ”썩어서 사라지는 존재“, 다시 말해 하나의 ”퇴비“라고 천명합니다. 김상일 역시 『호모 데우스 너머 호모 호모』에서 인류세의 시대에 인류의 위상이 과감하게 ”격하downgrade“되어야 한다고 주창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이 ”변화의 존재론“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우선적 권리를 파기하는 노력“에 있습니다.

 

중요한 관건은 표상주의 그리고 급진적 구성주의에 도사린 괴리감 내지는 불일치를 극복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라드는 수행적 실재론 내지는 ”행위 담당자의 실재론“을 이론의 전면으로 내세웁니다. 바라드의 수행적 실재론이란 어떤 고착성이 아니라, 과정의 유동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물질의 에너지가 현실을 연속적으로 만들고 변화하게“ 하는 과정을 다루는 존재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특징을 의미론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바라드에 의하면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상호적 방식으로 생동하는 행위 담당자들“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거의 방해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6. 새로운 물질 이론에 대한 비판적 논거

 

새로운 물질 이론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사변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유물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첫째로 사변적 존재론은 대체로 과거의 유물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물론은 이미 언급했듯이 오랜 역사 속에서 제각기 다른 이론적 틀이라는 존재론적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때로는 ”정신“이라는 관념적 영역 속에 포장된 채 교묘히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의 물질 이론은 서양의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라비아 철학, 관념 철학, 기계적 물질 이론 그리고 변증법적 물질 이론으로 발전되었는데, 사변적 존재론은 이러한 전개 과정을 좌시하고 과거의 물질 이론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으로 협소하게 파악하는 우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사변적 실재론은 과거의 물질 이론을 변증법적 유물론뿐 아니라, 철학의 역사에서 이어진 물질 이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사상적 갈래를 폭넓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기계적 물질 이론가, 신-칸트학파 그리고 현상학자들이 현재 생존한다면, 그들은 사변적 실재론을 접하면서, 이것을 하나의 ”형용 모순“으로 예단할지 모릅니다. 왜냐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사변적일 수 없고, 의식은 존재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어찌 사변과 연결될 수 있는가“ 하고 실증주의자들이 반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과거의 물질 이론을 결과론에 근거하여 협소하게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즉 과거의 물질 이론은 한결같이 물질의 바깥에서, 즉 인간의 일방적 관점에서 -멀리 떨어진 채- 물질을 마치 제삼자 대하듯이 고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몸 역시 물질에 포함(包含)되고 포함(包涵)될 수 있습니다. 과연 사변적 실재론이 인식의 생태적 전환을 통해서 물질의 실체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세계의 영혼 내지는 자연 주체는 기후 위기를 맞이한 우리에게 여전히 마치 암호처럼 비밀스럽게 다가오지 않는가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레엄 하먼과 같은 사상가는 사물 자체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객체에 대한 접근 가능성만을 인정했습니다. 그가 사변적 실재론을 포기하고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방향 전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의 토론에서 드러난 물질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논거는 물질에 대한 존재론적인 함의뿐 아니라, 여성의 몸 그리고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물질 이론의 위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첫째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종종 어떠한 해결책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80억의 인간들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 존재를 특수한 주체로 일반화하게 되면, 인간의 삶에 다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요소를 파기하게 되면 남는 것은 한마디로 침묵의 상태인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 사이의 실제 존재하는 불평등과 착취 등를 해결할 가능성마저 완전히 파묻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국적, 종교 그리고 인종 등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갈등이 문제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더 이상 새로운 물질 이론으로써 중화되거나 희석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물질 이론의 분석적인 틀은 인종, 국적, 종교, 성별 등의 차이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지엽적 주변 사항으로 취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물질 이론은 인간의 몸을 물질 속으로 포함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의 노력을 –어쩌면 기우일지는 모르나- 훼손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때로는 여성 존재의 동등성을 쟁취하는 과업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여성 신체의 잠재적 출산 가능성과 이를 합법화하는 성별 사이의 위계적 질서"에 관한 문제는 물질에 관한 존재론과 직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당면한 이슈와 직접 접목되지도 않습니다. 페미니즘의 방향성이 새로운 물질 이론의 영향을 통해서 얼마나 구체적이고 절실한 사회적 난제를 해결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몸으로서의 물질에 대한 에코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놀라울 정도로 자극을 가하고 있습니다.

 

(계속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