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니에"

필자 (匹子) 2021. 8. 19. 11:05

친애하는 P, 오늘은 에우리피데스 (BC. 484 - 406)의 극작품 하나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에 비해서 신의 권능 및 이로 인한 인간의 비극적 숙명 등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비교적 인간적 영욕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우리피데스는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가 특히 여성들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특징적입니다.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는 후세에 라신 (Racine), 괴테 (Goethe)의 작품에 의해서 더욱더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언제 탄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창작 동기라든가 연극의 구조 등을 감안하여 작품의 집필 시기를 기원전 412년경이라고 추측합니다.

 

친애하는 P, 처음에는 신화의 인명 지명들이 낯설겠지만, 자꾸 대하면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작품 역시 신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야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자신의 큰딸, 이피게니에를 소환합니다. 겉으로는 그리스의 맹장, 아킬레스와의 약혼이 그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속으로는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배가 신의 도움을 받아서 트로야로 순항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째서 자식인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영욕을 위해서 딸을 제물로 바치는 자는 반드시 이후에 보복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는 이피게니에를 둘러싼 이야기를 신화와는 달리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은 신화와는 달리 처녀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주를 제물로 바쳐지고 주장한 사람은 예언자이자 아가멤논의 책사인 칼하스였습니다. 칼하스의 광적 이념이 결국 이피게니에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 것입니다.

 

작품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지닙니다. 여신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니에가 바다에 수장 (水葬)되기 전에 그미를 구출합니다. 여신은 암양으로 변모하여, 이피게니에를 그리스 북쪽의 타우리스 섬으로 유혹합니다. 이피게니에는 그곳에서 여 사제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여 사제들은 그미를 처형시키자고 주장합니다. 이방인은 결코 사제가 될 수 없으며, 살아남아서도 안 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당시는 10년 동안의 지루했던 트로야 전쟁은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나중에 이피게니에의 어머니, 클뤼티메스트라는 남편을 저주하다가, 결국 귀환하는 아가멤논을 쳐 죽입니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다시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어머니, 클뤼티메스트라를 살해합니다. 그 후에 아테네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의 명령을 받고, 타우리스 지역으로 향합니다. 즉 그곳에 있는 아르테미스 석상을 아티카로 옮겨오라는 게 아폴론의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자신이 앓고 있는 간질병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한 이후부터 간질병으로 고통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상기한 이야기는 작품의 맨 첫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1 - 122행). 이피게니에는 상기한 이야기들을 보고합니다. 이피게니에는 전날 밤의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미는 악몽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꿈속에서 자신이 직접 어린 동생, 오레스테스를 쳐 죽여 제단에 바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트리덴 왕가의 마지막 자손인 오레스테스는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 아닙니까? 이피게니에, 오레스테스 그리고 필라데스는 타우리스의 어느 장소에 등장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스스로 찾던 사원을 발견하고, 밤 시간을 이용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의 석상을 옮기려고 계획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 (123 - 235행)에서는 여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고독한 그미는 고향과 가족들을 그리워합니다. 또한 자신의 버림받은 처지에 대해서 탄식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때 꿈에서 나타난 상은 놀랍게도 마치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맨 처음 합창은 고유한 견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오레스테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노래합니다. 간질 발작이 육체적 고통이라면, 어머니를 살해해야 한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극도의 자학 등이 정신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창은 이피게니에의 불행을 거론합니다. 그미는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의 계획에 의해서 바다에 빠져죽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습니다. 이피게니에는 아트리덴 왕가에 내린 저주로 인하여 자신이 불행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미는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비탄의 발언을 끝냅니다. 다음의 장 (236 - 391행)의 핵심은 어느 양치기의 보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치기는 두 사람의 낯선 남자에 관해 보고합니다. 한사람은 필라데스이며, 다른 한사람은 어느 정신 나간 남자 (오레스테스)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해안에서 붙잡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두 개의 장 (392 - 455행, 456 - 1088행)에서는 “재인식 (Anagnorisis)” 그리고 “술책 (Mechanema)”이라는 두 개의 모티브가 서로 엉켜 있습니다. [재인식의 모티브는 나중에 성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가령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요셉은 헤어졌던 형님들을 만나 상봉합니다. 요셉의 뇌리에는 볏단을 들고 절하는 형님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로 인하여 과거에 함께 정답게 살았던 형님들을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헤어졌던 남매가 다시 만나는 게 재인식의 모티브라면, 섬을 떠나기 위해서 지략을 꾸미는 게 인간적 술책의 모티브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필라데스와 오레스테스를 꽁꽁 묶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랑하는 두 남매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테스가 그러했습니다. 달리 치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남매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피게니에는 낯선 두 그리스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이름과 고향을 묻습니다. 이때 오레스테스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트로야에 관해서, 전쟁의 영웅 그리고 희생자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가령 헬레나, 칼하스, 오디세이, 아킬레스, 아가멤논, 클뤼티메스트라, 이피게니에 그리고 오레스테스 등이 소식의 내용이었습니다.

 

이피게니에는 소식 전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무명의 남자를 위해 추천장을 써주며, 아르고스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떠나지 않고, 필라데스로 하여금 추천장을 받게 합니다. 이피게니에가 편지를 가지러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 (필라데스 그리고 오레스테스)은 다정한 여사제가 어디 출신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P, 우정은 친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고결함에서 증명되는 것일까요? 오레스테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살아남을 기회를 포기합니다. 대신에 친구, 필라데스로 하여금 이곳을 떠날 수 있게 조처합니다. 동시에 그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가져오라고 하는 아폴론의 부탁이 자신을 속이려는 계략에 불과하다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643 - 722행) 이피게니는 필라데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즉 편지를 전하고 돌아온다면, 필라데스는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 이피게니에는 편지가 무사히 전달되기 위해서, 주소 그리고 편지 내용을 미리 구술해 줍니다. 편지는 오레스테스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제 필라데스는 섬을 떠나야 하고, 오레스테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필라데스는 친구를 버려두고 혼자 떠나는 데 대해 고통을 느낍니다.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어떤 기지가 떠오릅니다. “만약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여 배가 난파당하게 된다면, 그는 편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맹세의 저주는 풀리게 될지 모른다.”는 게 그 기지였습니다. 필라데스는 작별의 순간 무심코 오레스테스에게 편지의 내용을 전해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시학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나타나는 “재인식 (Anagnorisis)”을 매우 찬양한 바 있습니다.] 남매는 그제야 서로를 알아보고 뜨겁게 포옹합니다. 이때 필라데스는 두 남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비록 서로 상봉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 구원은 아니라는 게 바로 그 경고였습니다.

 

마지막 대목 (1017행)에서 필라데스는 어떤 해결방안을 생각해냅니다. 바로 여기서 술책 (Mechanema)의 모티브가 나타납니다. 즉 타우리스 섬의 야만인의 왕 토아스를 죽이든가, 아니면 야밤을 통해서 이곳을 탈출하자는 게 필라데스의 해결방안이었습니다.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테스는 두 가지 방안을 모두 거절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도주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토아스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로 인하여 몸이 더럽혀 졌다. 그는 아르테미스가 희생물을 요구하기 전에 여신상과 함께 높은 섬에서 죄를 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극적 긴장감을 위해서 합창이 중단됩니다.

 

다음 장 (1153 - 1233행)에서 토아스 왕은 사람들의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노예들은 모든 그리스 사람들 그리고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바다로 옮겨 놓습니다. 섬의 주민들은 아무도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모든 일은 비밀리에 추진됩니다. 마지막의 장 (1284 - 1496행)에서 다시 극적 사건이 출현합니다. 누군가 달려와서 토아스 왕을 찾습니다. 그리스인들이 몰래 출항하는 것을 발견하고, 타우리스 섬의 사람들은 이들을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토아스 왕은 이들을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여신 (dea ex machina)”, 아테네가 등장하여, 그리스인들의 출항을 도와줍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바다를 잔잔하게 해줍니다. 이로써 오레스테스는 타우리스 섬에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할라이로 가지고가서, 그곳에서 신전을 만듭니다. 이피게니에 역시 할라이 근처에 있는 브라우론 지역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사제로 살아갑니다.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는 비극이라기보다는 민요적 정서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서,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입니다. 기원전 412년에 이르러 누구보다도 에우리피데스에 의해서 반비극적인 창작 시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작품의 주도적 정조는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 대신에 재회의 기쁨, 고향에 대한 동경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복수의 여신, 에리뉘엔들이 살해자들에게 보복으로 가하는 대신에, 인간적 지략 그리고 우연의 유희, 승리의 여신 티케가 묘하게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작품 속에서 관객은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테스의 심리적 움직임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은 이제 신의 세계보다는 인간의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