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콜럼버스와 상상력 (1)

필자 (匹子) 2022. 12. 16. 10:08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1 - 1506) 의 초상화. 그는 찬란한 땅 인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횡단하였습니다. 인도는 동쪽에 위치하는 지역이었으나, 사라센 제국이 지나가는 사람을 살해하기 때문에 육로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처음부터 지구는 둥글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신봉하였습니다. "만약 달이 지구의 거울이라면 그 어두운 부분은 틀림없이 발견되지 않은 어떤 대륙을 보여주고 있다."(Plutarch). 그는 신대륙을 발견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 "서인도제도"라는 이름은 콜럼버스의 착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에는 원래 Non plus ultra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이를 부정하고 plus ultra라고 새겼다. 현재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모로코 지역의 제벨 무사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지브롤터의 해협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솟구쳐 있습니다. 여기에는 Plus Ultra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끝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페니키아 상인들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오가면서 영국으로 항해하였습니다. 이는 주석 그리고 기타 광물을 수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해상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대서양의 끔찍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즉 대서양 바다에는 수많은 괴물이 거주하고 있으며, 선박을 집어삼킬 정도로 흉폭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나은 곳은 없다 Non plus ultra." - 이 말은 대서양으로 항해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위의 지도는 콜럼버스의 네 번에 걸친 여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92년 8월 3일 그는 처음으로 세 척의 범선을 몰고 대서양을 지나쳤습니다. 대서양을 항해한 지 2개월이 지나자, 선원들이 두려움에 시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콜럼버스는 당시에 앵무새과에 속하는 자그마한 사랑 앵무새떼 Sittiche를 발견합니다. 앵무새떼가 있다는 것은 땅이 있다는 징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해의 방향을 남남서로 돌렸습니다. 콜럼버스는 생에 단 한 번도 플로리다의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만약 사랑 앵무새떼가 아니었더라면, 콜럼버스는 플로리다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만약 콜럼버스가 항로의 방향을 비꾸지 않았더라면, 광활한 미국땅을 밟은 사람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으며, 북아메리카의 황금 땅인 미국의 본토를 장악한 사람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으며, 세계의 문명을 지배한 자들도 에스파냐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Humboldt) 작은 우연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사람이 거둔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세비야 출신의 장사꾼이자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1451 - 15012)의 사진. 그는 콜럼버스가 죽은 뒤에 서인도 제도를 신대륙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법적으로 공공연하게 인정받게 됩니다. 신대륙은 1507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맨 처음 서인도 제도에 도착한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3개월 동안 먹는 음식을 불과 일주일만에 먹어치웠습니다. 그들은 황금을 찾아서 새로운 땅을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주물선점 (無主物先占)이라는 법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눈이 파랗고, 머리칼이 노란 백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인들은 주위에 널려 있는 모든 금과 은을 차지한 다음에 인디언들로 하여금 금은보화를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인디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인디언들로 하여금 노동하게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속마음을 이해한 다음에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써 인종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다음에 에스파냐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범선을 타고 서인도 제도로 떠납니다. 그들은 원주민들로 하여금 금과 은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더러는 깊은 바다에서 진주를 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루 14시간 동안 노동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은 도망치다가 잡히면 목숨을 잃었습니다. 16세기 초 불과 30년 동안에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총과 칼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원주민의 수는 약 천만에서 천오백만에 달합니다.  사진은 위대한 종교 개혁가이자, 인디언 인권옹호자인 바르톨로메 드 라스카사스 (1474 - 1566)의 초상화를 찍은 것입니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학살극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평생 노력하였습니다. 속담에 의하면 "인간은 피부 색깔은 다르지만, 피의 색깔은 한결같이 붉습니다." 그렇듯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살아야 합니다.

 

 

 

 

위의 동판화는 테오도르 드 브뤼 Theodor de Bry (1528 - 1598)가 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에스파냐 사람들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금과 은을 빼앗았습니다. 사망자의 수는 16세기에 천만에서 천오백만에 이르렀습니다. 서인도 제도에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을 거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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