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21일
베를린 리히텐베르크에서 의류 수선가, 요한나 슈테핀과 건축 노동자, 아우구스트 슈테핀의 첫째 딸로 태어나다.
1914년 - 1922년
초중등학교를 마치다. 경제적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대신에 회계와 상업에 관한 연수에 참가하다. 야간학교에 다니며 타자, 속기 그리고 러시아어를 배우다.
1924년
여동생 헤르타와 함께 “자연 친구”라는 여행 단체에 가담하다. 정치적 입장 차이로 약 1년 후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 단체를 탈퇴하다.
1926년
독일 공산당과 근친한 젊은 노동자들의 체조 단체인 “피히테”에 가입하다. 마르가레테 슈테핀은 단체의 대변인으로 일하다. 1931년 일하던 와중에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눈에 띄다.
1928년 - 1930년
베를린의 서점에서 도서 판매의 직원으로 일하다. 1930년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다. 결핵에 감염되다.
1931년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학교의 어학 코스에 등록하다. 이 학교는 베를린-노이쾰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헬레네 바이겔이 관장하고 있었다. 마르가레테 슈테핀 “젊은 배우 그룹”에 가입하다. 에른스트 오트발트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화 「쿨레 밤페」에 협연하다.
1932년
1월 2일에 브레히트의 극작품,「어머니」가 베를린 청년 인민 극단에 의해 초연되다. 슈테핀은 하녀 역을 맡다. 마르가레테 슈테핀은 정치적 발언을 풍자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다가, 제국의 수상을 경멸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다. 브레히트의 노력으로 다시 석방되다.
5월에 「쿨레 밤페」의 초연이 있었는데, 번역가의 자격으로 브레히트와 함께 처음 모스크바로 여행하다. 뒤이어 크림 반도에서 요양하다.
7월과 8월에 암머 호수 근처의 우팅 지역에 있던 브레히트를 방문하다.
11월에 자선 병원의 자우어브루흐 교수에 의해 폐결핵 진찰을 받다. 이때부터 브레히트를 위한 연애시 (소네트)를 집필하다.
12월에 브레히트가 머무는 하르덴베르거 가로 이사하다.
1933년
1월에 자선 병원에 치류하며 자우어브루흐 교수의 집도하에 공기주입 시술 (Pneumothorax)을 받다.
2월 - 6월: 테신/ 아그라의 요양소에 머물다. 이 시기에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과 브레히트에게 보내는 소테트가 탄생하다. 브레히트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나자, 바이겔과 아들 슈테판과 함께 독일의 떠났는데, 스위스의 카로나에 머물다가, 슈테핀을 방문하다.
6월 초에 슈테핀은 브레히트가 머물던 파리로 여행하다. 6월 7일에 브레히트와 바일의 발레극 「소시민의 칠거지악」에 공연되다. 브레히트와 바이겔이 덴마크로 떠난 뒤에, 슈테핀은 프랑스의 파리 등지에 머물면서, 브레히트와 아이슬러의 『노래, 시 합창』의 출간을 위해 애쓰면서, 독일 망명 작가의 모임을 주도하다. 브레히트와 함께 『서푼짜리 소설』 그리고 「뾰족 머리와 둥근 머리」의 집필에 참가하다.
12월에 브레히트를 따라 덴마크로 망명하다.
1934년
1933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덴마크 여배우, 루트 베를리우가 사는 코펜하겐에 거주하다.
4월 - 5월: 스벤보르에 있는 브레히트의 집에서 500미터 떨어져 있는 여관 “스텔라 마리스”에 머물다. 『서푼짜리 소설』개작에 참가하다.
7월 - 8월에 스벤보르의 스콤스보 해안에 거주지를 구하다. 이따금 카린 미하엘리스가 머물던 투뢰 섬에 머물다. 이때 「카린의 소설들」이 완성되다. 브레히트와 함께 「둥근 머리와 뾰족 머리」그리고 「호라치 사람들과 쿠라치 사람들」을 개작하다.
9월에 소련으로 여행하여 코카사스의 요양 시설에 머물다. 그곳에서 청년극 「내가 천사라면」의 집필을 시작하다.
1935년
5월까지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등지에 머물다. 브레히트의 극작품의 번역 및 『서푼짜리 소설』의 독일어판을 소련에서 간행을 도모하다. 브레히트는 3월에 미국 뉴욕으로부터 돌아와서, 5월 20일까지 슈테핀이 머무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다.
6월 - 12월: 때로는 코펜하겐, 때로는 투뢰 섬에 머물다. 슈테핀 덴마크어를 배우는 와중에 루트 베를라우의 소설 『비데레Videre』를 독일어로 번역하다.
12월 23일: 레닌그라드로 여행하다.
1936년
1월과 2월에 모스크바의 요양소에 체류하다. 3월과 4월에 크림에 있는 요양원에 머물다. 5월에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머물다. 5월 30일에서 7월 28일까지 런던에 머물다. 브레히트는 문화의 보호를 위한 국제 작가 연맹의 총회에 참석하다.
7월 29일에 다시 코펜하겐에 머물다. 8월 29일에 슈테핀은 덴마크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 덴마크의 저널리스트 스벤드 엔센 유울과 서류상으로 혼인하다.
1936년 10월 - 1937년 1월: 외레준트 병원에서 결핵 치료를 받다. 이 시기에 「야콥 게에르다의 실제 삶」그리고 「제 3제국의 공포와 참상」 집필에 참가하다.
1937년
1월 4일부터 다시 스벤보르에 머물다. 브레히트의 스페인 극작품 「빌바오에 관한 장성들」의 초고 집필에 관여하다. 노르웨이의 작가, 노르달 그리크의 극작품 「패배」를 독일어로 번역하다. 나중에 브레히트는 이 번역본을 바탕으로 「코뮌의 나날들」완성하게 된다.
여름에 브레히트와 함께 「카라 부인의 모기들」을 집필하다.
11월 - 12월: 모스크바의 요양소에 머물다. 폐수술을 받다.
1938년
1월에 덴마크로 돌아와서 코펜하겐의 외레준트 병원에서 재차 치료를 받다. 브레히트의 극작품 「율리우스 시저씨의 사업」 그리고 율리우스 시저 소설읗 위한 자료 등을 조달하고 번역하다. 덴마크어로 쓰여진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회고록 『기억』을 독일어로 번역하다. 「갈릴레이의 생애」, 투이 소설 그리고 브레히트의 이론서 집필에 참가하다.
1939년
4월 - 4월: 시집 「스벤보르 시편」의 발표를 준비하다. 브레히트와 바이겔은 4월 23일에 덴마크 망명을 청산하고 스웨덴으로 떠나다. 슈테핀은 5월 7일에 브레히트의 아들과 딸, 슈테판과 바르바라를 데리고 스톡홀름으로 향하다. 6월부터 슈테핀은 스톡홀름 인근의 리딩괴라는 지역에 혼자 머물다.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기억』의 3권과 4권을 번역하다. 덴마크어로 집필된 두 권의 소설 (한스 키르크의 『일당 노동자』, 한스 셰르피히의 『죽은 사내』)를 독일어로 번역하다. 브레히트의 극작품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 그리고 「루쿨루스에 대한 심문」의 집필에 참가하다. 12월에 슈테핀은 급성 맹장 치료를 받기 위해서 코펜하겐으로 돌아가다.
1940년
2월에 코펜하겐의 병원에 머물며 맹장 수술을 받다. 스벤드 옌센 유울과 법적으로 이혼하다. 4월에 브레히트는 가족들과 슈테핀과 함께 핀란드로 도주하다. 그곳에서 미국행 비자를 신청하다. 루트 베를라우 역시 브레히트 있는 곳으로 오다. 7월에서 9월에 핀란드의 작가 헬라 부오리요키의 영지, 마를레뵈크에 체류하다. 「헬라 부오리요키가 서술하고, 마르가레테 슈테핀이 재구성하다」가 완성되다. 슈테핀은 10월에 헬싱키로 향하다. 그 지역에서 「공자, 여성에 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가 완성되다. 「사천의 선인」「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를 공동 작업을 착수하다.
1941년
1월에 브레히트와 함께 헬라 부올리요키의 「에스토니아 전쟁 시편」를 번역하다.
3월과 4월에 헬라 부올리요키의 극작품 「니스카부오리의 여주인」을 독일어로 번역하다. 「아르투로 우이의 끝없는 상승」의 집필에 참가하다.
미국행 비자를 가지고 브레히트와 팀원들은 모스크바로 여행하다. 슈테핀은 병으로 인하여 헬라 부올리요키의 여비서 자격으로 방문 비자만 취득하게 되다. 팀원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려고 계획하다. 5월 18일 모스크바에 도착하다. 5월 22일 슈테핀이 쓰러져서 모스크바의 병원에 입원하다. 브레히트의 가족과 팀원들은 5월 30일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다. 6월 4일 슈테핀 모스크바 병원에서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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