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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필자 (匹子) 2021. 5. 31. 10:40

 

헤르만 브로흐 (Hermann Broch, 1886 - 1951)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Der Tod des Vergil)"은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집필되어, 1945년에 영어 그리고 독일어로 간행되었다. 브로흐는 1935년 「베르길리우스의 귀향 (Die Heimkehr des Vergil)」이라는 단편을 집필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문화적 종말에 처한 문학의 위기”라는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베르길리우스의 시대와 작가 브로흐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병렬적으로 투영시키고 있다. 가령 “시민주의, 독재 그리고 고대 종교 형태의 사멸” 등이 비교 대상들이다. 브로흐의 작품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어떤 자본주의 후기 사회의 작가의 상황을 추적하면서, 동시대인들에게 작가의 과업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세상은 눈앞의 도움을 원할 뿐, 시작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날 예술가는 브로흐에 의하면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브로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어째서 문학 작품은 오늘날 삶의 근본 문제를 마냥 회피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는가? 베르길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도래하기 이전 시기에 로마에서 시성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는 죽기 전 18시간 동안 “문학이 아름다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유용성을 위한 것인가?” 하고 고뇌한다. 죽음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작가에게 하나의 결단을 요구한다. 네 개의 긴 단락의 제목은 고대 철학의 4원소의 윤회를 암시한다. 다시 말해 오르페우스의 바퀴가 그러하듯이, 죽은 사람은 지나간 삶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근원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1) 물 (水) 도착: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함대는 브룬디시움에 정박한다. 함대의 어느 배 위에 병든 베르길리우스가 누워 있다. 항구에는 군중들이 모여, 황제의 군인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짐승처럼 웅성거린다. 소음에 고통을 느끼며, 베르길리우스는 애써 편안함을 유지하려고 한다. 어느 소년이 그에게 다가와서, 그를 왕궁으로 모시고 간다.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빈민가의 길을 지나친다. 이때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아낙네들의 울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수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인지, 페스트가 창궐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왕궁에 들어선 뒤 베르길리우스는 어느 방으로 안내받는다. 베르길리우스는 깊은 충격에 휩싸인다. 왜냐하면 자신이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전혀 아무 것도 접하지 못하고, 고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2) 불 (火) 추락: 다음날 저녁 베르길리우스는 심한 열병에 시달린다. 그의 상상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비난하는 듯이 어떤 지옥세계에 관한 방랑의 상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는 오르페우스, 아에네이스 그리고 단테 다음으로 지옥의 끔찍한 상을 처절하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물론 브로흐는 단테의 ?신곡? 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단테의 작품과 유사한 대목을 다루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지금까지 아름다움 속에 안주했던 자신의 죄 많은 삶을 속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의 불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버리려고 작심한다. 이때 일그러진 경악의 상에 흥분된 베르길리우스는 창문을 통해서 세 명의 유령 같은 술 취한 자들이 서로 말다툼을 벌리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본다. 세 명의 논쟁은 결국 살인으로 끝날 것 같이 보인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존재는 마치 짐승으로 변한 채 무대 위에서 아무 도움 없이 서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관객을 위한 모든 아름다움을 “어떤 제어되지 않는 잔악한 유희”라고 저주한다. 진정한 창조란 예술 자체가 아니라, 도덕적 구분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흙 (土) 기대: 베르길리우스는 순간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친구들이 그를 찾아온다. 베르길리우스는 주치의에게 말한 바 있듯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불태우려는 결심을 전한다. 밤 동안 그는 자신이 각고의 노력을 대해 집필했던 불멸의 작품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친구이자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힘들게 대화를 나눈다. 아우구스투스는 많은 문제를 오해했으며, 불멸의 서사시를 불태우는 데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를 통하여 베르길리우스는 다음의 사항을 깨닫는다. 즉 희생에 포함되어야 할 사항은 순종 내지 겸허함이며, 사랑의 어떤 행위라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작품을 후세에 남긴다.

 

여러 꿈들은 깨어있는 순간에도 베르길리우스의 의식 속에 떠오른다. “마치 기나긴 시간이 의식에 의해 차단된 듯이” 그의 뇌리에는 지나간 사실, 현재의 사건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순간들이 중첩되어 흐른다. 심지어 그는 고대의 찬란한 천국을 가상적으로 바라본다. 바로 그곳에는 오래 전에 사랑하던 여성, 플로티아 (Plotia)가 베르길리우스에게 손짓하지 않는가? 베르길리우스는 초지상적인 천사와 같은 소년, 뤼사니아스 (Lysanias, 고통을 구원하는 자)를 바라본다. 뤼사니아스는 시인의 청년 시절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아쉽게도 시인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

 

뤼사니아스는 어느 경건한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노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에게는 “거짓된 구세주”로 이해될 뿐이다. 그렇지만 베르길리우스가 “아이”의 상을 떠올린 것은 그 자체 무척 놀랍다. 실제로 베르길리우스는 네 번째 「전원시 (Ekloge)」에서 아기의 상을 선취한 바 있는데, 이는 이후에 도래할 그리스도의 강림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아이 등의 원형을 묘사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자웅동체의 요소를 도입한다. 자웅 동체의 요소는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구세주를 갈구하는 신비주의의 성향을 예리하게 수용한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브로흐의 심층심리학에 관한 놀라운 식견을 유추할 수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유언을 구술하며, 낮에 느꼈던 이성적이고 밝은 의식을 잃어버린다. 대신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안내한 길을 정반대로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왕궁을 나와, 비참한 사람들이 사는 빈민가를 지나, 항구로 향한다.

 

 

 

 

 

(4) 공기, 귀향: 베르길리우스는 항구에서 해안가의 보트를 타고 끝없이 수평선이 펼쳐진 대양으로 향한다. 이제 모든 인간적 요소는 그에게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소년, 뤼자니아스는 처음에는 마치 신비로운 신 헤르메스처럼 안내자의 역할을 행했는데, 이제 옛 애인 플로티아와 동일 인물로 화하고, 나중에는 베르길리우스 자신과 용해된다. 주인공의 귀향은 근본적으로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과정과 같다. 매일 창세기의 일주일이 파기된다. “그”가 동물적으로, 식물처럼 변모되는 동안에도, 어떤 관찰하는 눈 (眼)만이 사라지지 않는다. 만물은 돌, 흐르는 빛, 수정, 어두운 빛 등으로 변화된다. 자아는 우주 속으로 확산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죽어가는 자의 의식은 변모된다. 그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상”을 바라본다. [이것은 기독교의 상징적 상인가, 아니면 어느 구세주의 도래를 약속하는 상인가, 아니면 베르길리우스 자신의 재탄생을 뜻할까?] 베르길리우스는 어떤 거품소리를 포착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신의 말씀은 거품소리 속에서 들린다고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내적 독백은 -소설 전편에 걸쳐 커다란 엄밀성을 유지한 채- 마지막 장에 이르러 과거에 나타난 바 없는 놀라운 표현력으로 상승된다. 삶의 “한계에 이르는 끝없는 접근”은 예술의 한계에도 끝없이 가까이 향한다. 작품은 스스로를 망각할 정도로 리듬으로 두근거리는 언어를 동원하여, 놀라운 착상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이 저세상으로 향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착상이다. 나아가 작가 브로흐는 신비로운 상 속에다 자아의 어떤 무한한 상상 공간의 상을 그대로 담았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작품의 예술적 가치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그 자체 약점을 지니고 있다. 브로흐의 언어는 놀라운 상상 공간에 대한 묘사를 무리 없이 담지는 못한다. 너무도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상황은 그 자체 문학적 묘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브로흐는 구체적 형상이 은폐된 추상적 서술 내지는 신비로운 여백으로써 엄청날 정도로 놀라운 저세상의 상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나아가 베르길리우스는 어떤 추악한 삶 앞에서 어떤 “찬란한 죽음의 상”을 담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순적인 존재를 구조하는 것은 어떤 아름다운 죽음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죽음은 유용한 “삶”을 위한 모든 결정들 그리고 모순들을 파기시키도록 작용하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베르길리우스가 작품 "아이네이스"를 후세에 남기는 것은 그 자체 논리적 관련성을 결여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