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보헤미안 비베스의 "야만적인 소네트"

필자 (匹子) 2020. 7. 27. 10:40

 

친애하는 Y, 보헤미안 비베스 (Bohemian Vibes)라는 시인을 들어보셨는지요? 비베스가 누구인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가명이라는 게 밝혀집니다. 그렇지만 보헤미안 비베스는 참으로 멋진 이름이로군요. 라틴어로 “비브로 (vibro)”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흔들다”, “부들부들 떨다” “번쩍거리다” 등을 의미하지요. 집시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육체적 사랑을 나눌 때에 부들부들 떨며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말인데,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드는 군요.^^ 오늘 보헤미안 비베스의 재미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시의 제목은 “야만적인 소네트 (Barbarisches Sonett)”입니다. 일견 울라 한 (Ulla Hahn)의 「고상한 소네트 (Anständiges Sonett)」라든가, 슈테판 게오르게 (St. George)의 연애 시, 「유혹 (Entführung)」을 패러디한 것 같습니다.

 

이리 와, 날 위해 야만적인 소네트를 써 줘,

방자한 작품 하나를 여러 기이한 단어로 -

나를 유혹해서 부도덕한 장소로 데려가 줘,

머뭇거리지 말고 나와 함께 침대 안으로.

 

아무 것도 묻지 마. 무 (無)에게만 기대어 봐.

방종한 시구를 너의 등에 칠하게 해.

너의 몸을 어두운 시 예술로 마구 치장해.

네 얼굴 눈 감은 채 그냥 맡겨 봐.

 

문 잠그지 마. 창문은 그냥 열어 놓게.

아무 생각 마, 두려워 말고 몸 던져 보렴.

깨끗이 다듬은 손톱으로 꼭 잡아 줄 게.

 

키스를 퍼부을 게, 부드럽게 취해 보렴.

거칠고도 흥분하게 만드는군! 너를 가질 게.

너의 신선한 살 속으로 푹 빠지게 하렴.

 

 

Barbarisches Sonett von Bohemian Vibes:

 

Komm, schreib mir ein barbarisches Sonett,

Ein wüstes Werk aus rätselhaften Worten -

Entführe mich zu sittlosen Orten

Und nimm mich ohne Umschwief mit ins Bett.

 

Stell keine Fragen. Stütz dich auf das Nichts.

Schmier mir verruchte Verse auf den Rücken.

Lass deinen Leib mit dunkler Dichtkunst schmücken!

Leih mir die Sphären deines Angesichts.

 

Vergiss die Türen. Halt die Fenster offen,

Hör auf zu denken! Lass dich furchtlos fallen

Ich fang dich mit frisch geschärften Krallen.

 

Und küsse dich gefügig und besoffen.

Du machst mich irr und roh! Ich will dich haben

Und mich in deinem frischen Fleisch vergraben.

 

친애하는 Y, 시구는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제 1연에서 시적 자아는 작품의 집필 행위를 육체적 사랑 나누는 짓거리와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소네트를 야만적으로 집필하는 행위는 그 자체 짝짓기와 동일합니다. 이로써 작품의 탄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내지 종족 번식과 결부되는 게 아니라, 쾌락의 향유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작품 집필은 거룩한 성 나누기가 아니라, 기껏해야 “방자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격정적인 남녀에게 성 교합의 단계는 필요 없습니다. 만남, 데이트, 결혼에 대한 약속 - 이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시적 화자는 상대방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침대로 가자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머뭇거리지 않는 행동은 앞의 번거로운 형식적 절차를 생략하자는 의미를 가리키지요.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혀 대신에 방종한 시구로써 상대방의 등을 핥아주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시 예술은 그야말로 사랑을 위한 전희 (前戱)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로써 임의 몸에는 모든 예술적 기교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랑을 나누는 “부도덕한” 장소입니다. 시적 화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위를 의식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남들이 보든 말든, 마치 곤충처럼 짝짓기하자는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면, 그럴수록 인간 동물은 긴장하게 되고, 성적으로 흥분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남을 의식한다는 게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에, 시적 자아가 외부에 대해서 개의치 말자고 제안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연은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성적인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시 말해 남자는 이 경우 여자를 일방적으로 정복하지 않으며, 그냥 여자의 몸속으로 푹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여자 역시 남자에게 성적으로 그냥 정복당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포옹하려 합니다. 시적 자아는 자신과 동일하게 행동하라고 파트너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철 (凹凸)의 만남, 바로 이 경우에 있어서는 상하 구분도 빼앗김도, 정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Y, 사람들이 마치 동물처럼 아무런 제어 없이 짝짓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어떤 강제적 윤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강제적 윤리가 없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혼란스럽게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마음을 즉시 행동으로 실천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인간 동물이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한다면, 노이로제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 (Malinowski)는 『원시인의 성생활』에서 남태평양의 트로비안더 원시인의 성생활을 기술하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자식들이 보든 말든 간에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마음대로 선택하여 성행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성행위 연습을 해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도덕적으로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너 뮐러 (Heiner Müller)는 “길거리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즉시 입을 맞출 수 없는 게 바로 인간 삶의 비극을 그대로 반증해준다.”라고 말했습니다.

 

친애하는 Y, 당신은 따뜻하고 온화한 섬, 괌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그곳의 선남선녀들은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잠깐 얼굴을 붉히다가, 둘이서 아무 말 없이 산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은 옷고름을 다시 여미고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옷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버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헤어진다고 합니다. 괌의 젊은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노골적인 연애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말과 글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향유하고 실천하니까요.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 동물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음탕한 글을 읽거나 음담패설을 나누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하면 남한의 선남선녀들은 어떠한가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던지지 못하고 오랫동안 가슴을 앓곤 합니다. 그럴수록 임의 모습은 더욱더 휘황찬란하게 보이고, 스스로의 감정을 파먹게 하지요. 불행하게도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데 신경을 쓰게 만듭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임을 망각하게 되지요. 인간은 어쩌면 하찮은 동물, 곤충들보다 더 어리석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