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호 3

박설호: (5) 학생들과 함께 읽는 브레히트의 시, '후세사람들에게'

(앞에서 계속됩니다.) 6. 나오는 말 브레히트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폭력을 거의 동시적으로 겪었다. 브레히트는 “계급의 전쟁”이라는 전선으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 거기에는 스탈린주의라는 “거대한 호랑이의 이빨”이 도사리고 있었다. (각주: 브레히트의 시 「M.을 위한 묘비명」과 비교하라. B. Brecht: WA. Bd. 10, S. 942.). 그렇지만 냉전의 시대에 자신이 소련을 문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할 때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누워서 침 뱉는” 격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역이용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브레히트는 -「파처 Fatzer」 단편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혁명을 외면한 채, 결코 자기네들끼리 집안싸움..

46 Brecht 2025.05.26

서로박: (3) 속죄와 자기 반성으로서의 기억. 보브롭스키의 '유년'

(앞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혹은 사내들은 말을데리고 강둑길로 나와,찬란한 고동색 말을 타고웃음을 터뜨리며깊은 곳을 뛰어 넘었지.(Oder die Burschen kamenden Uferpfad her mit den Pferden,auf den glänzenden braunenRücken ritten sie lachendüber die Tiefe.) 제 1행에서 “혹은”이라는 표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표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 3연, 제 4연 그리고 제 5연에서 언급되는 내용이 과거 유년 시절에 대한 완전한 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상기한 연에서 묘사되는 것은 유년 시절에 겪었던 체험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에 말을 타고 놀던 시절이라고 해야 타당할 것입니..

45 동독문학 2025.05.09

요한네스 보브롭스키

요한네스 보브롭스키 (1917 - 1965). 그는 속죄와 자기 반성으로서의 기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겸허하고 경건한 독일 시인이었다. 요한네스 보브롭스키는 1917년 지금의 폴란드 지역인 라스텐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침례교를 신봉하는, 약간 보수적인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관리였는데, 1928년에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하였습니다. 보브롭스키는 그곳에서 김나지움에 다녔습니다. 보브롭스키는 여름이면 근처에 있는 메멜 강으로 휴가를 떠났는데, 그곳의 체험이 자신의 작품에 빼곡하게 반영됩니다. 리타우 지역에는 여러 곳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인종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예술사는 주로 회화, 조각 등에 관한 예술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 영역은 반드시 예술만의 역사를 다르지는 ..

9 문학 이야기 2019.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