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반공주의 그리고 메카시즘: 첫째로 반공주의는 우리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린 오래된 나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요즈음 MZ 세대는 반공주의 내지는 매카시즘의 폐해가 지금까지 한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가했으며, 얼마나 혹독한 심리적 아픔을 안겨주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반공법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어떤 경고의 기능이 아니라, 국가가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서 수없이 남용된 바 있다. 이는 이승만 체제에서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리영희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매카시즘의 직간접적인 폐해에 관해서 수없이 지적하였다. 21세기 현대 사회에 빨갱이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남한 사람 가운데 미사일을 폭죽처럼 터뜨리는 김정은을 동조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선거철마다 언급되는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북풍이라는 선동과 조작, 걸핏하면 “빨갱이 운운”하면서 생각을 달리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속출하고 있다.
7. 공산주의의 세계는 아직 (?) 역사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계급 없는 사회는 하나의 이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공산주의의 사회는 실제 현실에서 원래의 의향대로 실천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재화를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는 사회적 형태는 1980년대 말 유럽에서 태동한 생태 공동체에서 엿보일 뿐, 국가의 체제 하에서 기획되고 실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소련과 중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der real-existierende Sozialismus”를 언급하면서,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이념으로 규정하였다. 중국의 마오와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빌려 왔던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용되던 개념인 공산주의는 엄밀히 따지면 더 나은 미래에 출현할 이상적 가능성의 이념이 아니면 허구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마치 반공주의가 힘없는 인민을 단속하고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듯이,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소수들을 구속하고 탄압하는 수단으로 오남용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준다. 즉 수많은 국가는 공산주의, 혹은 반공주의 등의 미명으로 개개인의 인권을 억압하고 탄압해 왔다.
8.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자고로 공산주의란 재화를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소비하는 삶의 방식에서 출발한다. 공산주의에 반대되는 사고는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개개인의 재산과 사유권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는 경제적 주체와 소유권의 차원에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다. 가령 에른스트 블로흐는 예수가 추구한 원시 기독교의 사상을 “사랑의 공산주의”라고 명명하였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생산 방식과 공동체의 소유권을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정의 내리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어처구니없게도 민주주의의 사고와 정반대되는 이데올로기로 곡해되었다. 이러한 오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위정자들이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거짓과 위선을 동원하여 퍼뜨린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더 이상 헤게모니와 결부된 정치적 이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유명무실한 국가 보안법을 당장 폐지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다.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사상으로 가치 하락해서는 안 되며,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시각에서 냉정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몇몇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생활 방식으로 축소화되고 말았다. 이를 고려한다면 “빨갱이”, “반공” 등의 단어는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어느 정도 효력을 끼쳤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진부한 것이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축구장에서 서성거리는 “붉은 악마”로 퇴색되어 있을 뿐이다.
9. 둘째로 진정한 보수는 평등한 삶을 추구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보수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왜냐면 보수주의자들은 원래 지니고 있던 기득권 내지는 소유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하나의 용인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고다. 흔히 경상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보수를 표방한다고 말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조선 시대의 유교주의 그리고 신라 시대의 “골품”이라는 계층 차이를 아직도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것 같다. 마치 헌 부대와 같은 삼강오륜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지 모른다. 문제는 인간이 수직 구도로 차별당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관습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만인이 양반과 상놈으로 구별되었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제도는 세상에서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만인은 평등한 삶을 누리는가? 그렇지 않다. 성골, 진골의 구분이라든가, 양반 상놈의 차이는 제도적으로 사라졌지만, 우리의 의식에 차별은 여전히 온존해 있다. 재산의 차이로 인하여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에 사람이 있다. 말하자면 “돈”과 “재산”이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10. 정치의 팔이 안으로 굽어서는 안 된다. 정치가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보안관이 되어야 한다. 윤석열처럼 더 이상 자신의 가족과 친구, 지인만을 무조건 우선시해서는 아니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 간에 계층 차이를 극복하고, 만인의 평등을 수미일관하는 정책으로 삼아서, 이를 연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를테면 산업 재해, 의료 제도, 실업 보험, 연금 등과 관련한 바람직한 사회 보장제도를 더욱 세부적으로 다듬고 가꾸어나가는 일은 근본적으로 진보주의자들만의 정책적 과업일 수는 없다. 가령 19세기 후반 독일 프로이센에서 실업, 산업 재해 그리고 연금과 의료 등을 위한 사회 보장의 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놀랍게도 보수주의를 표방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였다. 비스마르크는 국민 개개인을 자신의 가족으로 그리고 친구로 생각하고,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앞장을 섰다. 그는 부자유친, 붕우유신을 몸소 실천하는 정치가였다.
11. 셋째로 진정한 보수는 에너지와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현재 상태Status quo에 상응하는 제반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고, 자원을 아끼는 것은 보수주의의 핵심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오래된 좋은 것을 지키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자력 기술 개발은 위험한 정책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정책이다. 어쩌면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기후 변화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RE100 정책을 제시해야 하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가이어야 한다. 석탄, 석유 그리고 원전 사업은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면 내리막길의 산업이다. 그렇기에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성화하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에너지 고속도로의 시설 확충을 발의해야 할 사람은 이재명뿐 아니라, 얼마든지 보수를 추구하는 정당인 당원일 수도 있다. 미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핵폐기물이라는 끔찍한 유산을 물려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12. 넷째는 당원 민주주의의 활성화이다. 국민의 힘 정당에서 가장 문제는 당원들의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라고 한다. 원래 당원이라면 누구든 간에 당 대표 내지는 지역구 대표의 권위에 무조건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경상도의 많은 사람은 국회의원 후보자가 어떤 불법을 저질렀든 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남이가?"하고 외치면서, 무조건 국민의 힘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다. 국민의 힘 정당에서는 거의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모든 정책은 당 내부에서 서로 의견 차이를 드러내고, 서로 담론을 통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 당수의 말에 의해서 자동으로 정해진다. 이는 더불어 민주당 "개딸"들의 강성적인 태도와는 원천적으로 다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수박"들은 정치 판에서 사라져야 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당당히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는 일 – 이것은 민주주의의 소통을 위한 첫걸음과 같다.
13. 윤석열 정권의 문제점: 현 정권은 거짓과 위선 그리고 무 대책으로 무장해 있었다. 굥석열은 정치를 하지 않고, 최고 권력을 그냥 누렸다. 국회를 통해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기는커녕 야당의 법 개정에 거부권으로 일관했다. (어디 그뿐이랴? 1. 국고의 과다 지출 내지는 대통령실 이전으로 인한 수많은 세금 낭비, 2. 친일 매국의 정치로 인한 역사 왜곡 및 역사의 정통성 훼손, 3. 독도를 일본땅으로 내어주며, 오염수 방류 동의 들 일본의 국익을 위하는 태도, 4. 압수수색과 세무 조사를 통한 방송 언론에 대한 탄압, 5. 북한에 대한 자극으로 인한 남북한의 갈등 고조, 6. 반대파 대표인 이재명을 숙청하려고 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검찰 독재, 7.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외교 단절로 인한 수출 부진과 내수 경제적 어려움, 8. 물가고를 겪는 자영업자와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반 대중에 대한 무시와 외면, 9. 온갖 부정 부패를 자행하는 김건희의 국정 농단 그리고 총선 개입 의혹, 10. 의료 대란으로 인한 응급실 뺑뺑이 사태 등에서 드러나는 국민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 등) 유권자들은 그와 김건희의 속임수에 놀아나서 주권을 상실해 왔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정치에서 폭력과 거짓은 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솔직한 토론이 정치 영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14, 네 가지 제안 사항: 정치가는 맹폭한 사자가 되어서도, 간사한 여우가 되어서도 안 된다. 만약 국민의 힘이 해체되고, 새로운 보수의 정당이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하자를 지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나 역시 특정 측면에서 무조건 보수 정당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1) 반공이라는 사악한 매카시즘의 척결, (2) 바람직한 사회 보장의 정책을 통한 평등과 호혜의 추구, (3) 생태 친화적인 에너지 정책의 구현, (4) 합리적인 토론을 활성화하는 당원 민주주의의 회복 등은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정치가들이 사자와 여우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바람직한 정치가로 거듭나기 위한 방향은 무엇일까? 필자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국회의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고, 실제의 사안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타협하는 일 말이다. 여의도 국회 도서관은 너무나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거짓과 폭력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민주화의 첫 번째 걸음이다. 국힘 국회의원들이 거부권을 거부하게 되면, 그들 미래는 계속 암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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