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과 정신분석
분석치료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토대로 한 치료법을 말한다. 정신분석 치료의 원리는 방어나 신경증을 원래의 상처에 되돌려줌으로써 고착이나 방어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을 “초자아가 있는 곳에 자아가 있게 된다.”는 말로 요약하였다. 이 말은 당시 프로이트가 살았던 사회를 지배하였던 도덕과 규율 대신에 원초아의 감정 소산을 통해 자아에게 판단하고 제어할 힘을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리비도(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 또는 무의식에 의해 조종되는 자아가 리비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게 되면 그것이 치료라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최면치료의 암시 대신 분석적 암시의 방법을 원용한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전자가 은폐하고 겉모양을 꾸미는 미용술 같은 것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드러내고 제거하는 외과 의술 같은 것이다. 전자는 발작(증상)을 없애기 위해 암시를 통한 억압을 강화하지만, 후자는 증상을 일으키는 갈등에 메스를 대고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암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치료적 협력관계라 말할 수 있다. 자유연상을 통해 참여자는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고 그것을 참여자의 자아가 객관적인 눈으로 통찰하게 함으로써 자아가 고착된 또는 저항하는 리비도를 자기 통제 하에 둘 수 있게 한다.
아동에게 이러한 분석치료를 적용할 경우에는 절차와 기법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아동은 성인만큼 이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경우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우선의 고통을 감내하고 미래를 위해 치료를 받으려고 하나, 아동은 자기 통제나 감시 능력이 부족하다. 치과에 가서 썩은 이를 뽑는 것이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동이다. 그리고 아동들은 자유연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놀이로 대체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반복 충동의 표출, 과도한 정서, 갑작스러운 종결(불안을 의미함), 그보다 더 어린나이로의 퇴행, 자기 통제력 상실, 갈등 상황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만든 장치들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아동이 치료사에게 하는 의사소통은 아동의 인지발달 수준을 반영하므로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가 이혼하는 경우 5세 아동은 그가 가지고 있는 햄스터가 어디서 잠을 자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14세 아동의 경우에는 어느 부모를 따라가야 할지를 걱정한다. 여기서 분석과 해석을 할 경우 5세 아동의 걱정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치료는 아동의 인지 수준, 아동의 기호와 흥미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며 과거의 갈등을 해석할 경우도 아동의 인지 수준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프로이트 - 라캉의 분석기술
치료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참여자는 하루 빨리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증상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를 받는 사람은 주위의 가족이라든가 자기의 고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문학의 치료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치료를 한다고 하지 말고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문학은 참여자의 리비도의 정체를 문학으로 옮겨 갈 수 있고, 자유연상의 길목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치료사는 참여자에게 진실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무관하게 참여자가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자유연상을 하게 해야 한다.
참여자는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에 대해 모르기를 원한다. 참여자들이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치료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증상이 대리만족을 준다고 하더라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의 어떤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참여자는 치료사를 찾아가서 가족에게서 당하는 고통을 발설함으로써 어떤 대리 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상적인 “쾌감”일 뿐이다.
요구와 욕망의 차이
예를 들어보자. 아이의 언어는 불명확하다. 아이가 울면 그것이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뜻인지, 배가 고프다는 뜻인지, 혹은 아프다는 뜻인지를 부모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욕구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타자(부모)를 향해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부모가 아이의 울음을 자기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달라는 욕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아이가 우는 것이 욕구와는 관계없는 존재, 믿음, 관계, 관심 등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욕망한다고 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치료사는 그의 요구를 좌절시켜서, 일차적으로 그 속에 싹트고 있는 욕망을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은 결여에서 나오기 때문에 욕망이 충족되면 참여자는 지루해하며 더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사는 욕망을 명확히 해석하여 제시하면 안 된다. 그러면 참여자는 그 해석에 순응하게 되고 차츰 무의식을 내보이지 않게 된다. 치료사는 다의적인 해석을 내놓아야 하고 모호하고 신비롭게 만들어야 한다. 문학 작품은 이에 매우 적당하다. 해석의 다양성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치료사가 참여자의 글 읽기 내용이나 글쓰기 내용에 대해 확고하면 할수록 참여자는 의식적인 수준에서 그를 거부하기가 쉽다. 치료사의 직접적이고 명확한 해석은 오히려 참여자의 방어만 가중시킬 뿐이다.
욕망은 대상이 아닌 원인이다. 프로이트-라캉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욕망에는 대상이 없다. 왜냐하면 욕망하는 어떤 것이 주어지면 주체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스테리나 강박증은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두 상이한 방법이다. 강박증의 욕망은 처음부터 만족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반면 히스테리는 욕망을 불만족한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시도다. 프로이트 방식으로 말하면 충족되지 않는 원망에 대한 원망이다. 라캉은 이를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히스테리나 강박은 욕망의 만족을 저지하기 위하여 장애물을 설치한다.
치료사와 문학은 참여자의 욕망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신경증자는 타자의 에고 이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들기 때문에 치료사와 문학에 욕망을 전이한다. 이렇게 욕망을 전이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 치료의 기술이다.
3. 프로이트-라캉의 신경증 진단
프로이트-라캉에 따르면 정신병에서 무시되고 파기되어온 것은 아버지, 즉 부권이다. 부권적 기능의 부재는 정신병을 진단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여기서 부권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기능일 뿐, 아버지가 실제로 있다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권적 기능은 아버지다운 면모, 즉 법과 같은 상징적 기능을 아울러 포괄한다. 상징적 기능이란 현실적 삶에서 보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이 어떤 연령이 되어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차제에는 영원히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정신병을 “한번 있으면 머무는 질병”이라고 하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은 한때 마음속에 스쳤던 지각이나 사고를 관념과 따로 분리해 무의식 속에 방치된, 다시 말해서 망각된 무엇이다. 따라서 억압은 파기 내지 무시와는 달리 지각이나 사고를 완전히 지워 버리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부정」이라는 논문에서 밝혔듯이, 아이는 부모의 성교 장면을 목격했을 수 있다. 아이가 이 장면을 억압하려면, 그는 정신의 힘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라캉은 억압된 것은 감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감각이나 감정에 부착된 관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의식은 감정이 아니라, 관념들로 구성된다. 그런 이유로 참여자들은 원인도 모른 채 불안에 떨거나 우울증, 죄의식에 빠진다. 생각을 망각하고도 감정이 그대로 잔존하는 경우를 히스테리라 하고, 반대로 의식이 생각을 허용하지만 감정을 불러내기 못하는 경우를 강박증이라 한다.
강박증 환자는 사건을 회상하지만 감정 상태는 떠올리지 못한다. 억압이 관념과 결부된 감정의 고리를 끊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강박증 치료는 관념과의 고리가 끊어진 감정을 되살려오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치료가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다.
엄마가 쓰다듬어 주는 것이 메스껍다면, 이는 엄마에 대한 욕망이 억압되어 있음을 뜻한다. 얼굴 경련은 억압되어 버린 혐오스러운 생각이나 더 많은 것을 보고자 하는 억압된 소망에서 온 것일 수 있다. 강박증 환자가 배설 기관이나 소화기관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라캉은 신경증의 증상은 언어의 역할을 하며, 억압은 바로 그 언어를 통해서 표출된다고 한다.
프로이트 강박증은 죄의식으로, 히스테리는 혐오감으로 반응한다. 라캉에 따르면 둘은 같은 신경증이면서도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양자는 신경증의 기본 메커니즘이 주체가 타자에게서 분리되는 순간에 대상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온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강박증 환자는 분리의 순간에 대상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연관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도표 8.1 (교과서 301페이지를 펴주세요)
엄마의 젖가슴은 아이가 만족을 얻는 최초의 근원이다. [그림8-1]에서 유아는 왼쪽 원 안에, 타자인 엄마는 오른쪽 원 안에 위치시키고 양자 사이의 교차 부분에 젖가슴을 위치시킬 수 있다. 처음에 유아는 엄마의 젖가슴을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아가 엄마에게서 분리되면 젖가슴을 타인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체험한다. 이때 아이가 상실한 것은 엄마가 아닌 성적인 대상인 것이다. 이때 그는 스스로의 욕망을 보상해줄 수 있는 대상을 얻음으로써 통일성과 정체성을 얻게 된다.
도표 8.2 (교과서 302페이지를 펴주세요)
[그림8-2]에서 보듯이 강박증 환자는 대상 (어머니의 젖가슴)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 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강박성 인격 장애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다. 강박증 환자가 타자를 무화시키고 중화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은 결코 멀리 떨어진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강박증 환자는 대부분의 경우 남성이다.
도표 8. 3 (교과서 303 페이지를 펴주세요) 이와 반대로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가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분리가 일어나면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의 상실을 엄마-타자의 상실이라는 관점 하에서 생각하게 된다. 히스테리 환자는 주로 여성이 많은데, 그 이유는 환자가 자신이 없이는 엄마가 완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도표에서 나타나듯이 히스테리 환자는 강박증 환자처럼 사랑의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타자가 욕망하는 바를 알아내어 그것의 일부분이 되기를 원한다. 강박증 환자의 경우 일탈된 어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반하여, 히스테리 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이전된 사랑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되찾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테리 환자의 대상이나 ‘성적 상대’는 상상적 타인도 아니고 욕망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실재적 대상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엄마와의 관계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재생산해낸다. 히스테리 환자가 욕망 억압의 과정은 이렇게 설명된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을 부분적으로 되찾기 위해 스스로 그 욕망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엄마의 사랑이 타자에게 이전되었다는 것을 미리 감지하기 때문이다. 환상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타자의 대상으로 이전시키고,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애인이나 배우자인)타자는 욕망하는 주체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기 떄문에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의 욕망을 불만족한 상태로 유도한다.
그에 반해 강박증 환자는 자신을 완전한 주체로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엄마의 사랑이 결여된 주체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실제 성관계보다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위를 즐기면서 자신이 타자에 종속된 주체라는 점을 극구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상대는 자기의 엄마의 형상으로 변형시키든가, 아니면 상대, 즉 애인으로서의 여성을 고유한 객체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
책 읽어주는 남자<Der Leser>
- Bernhard Schlink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 1950년대 독일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한나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허약한 소년 미하엘 베르크는 황달병으로 인하여 귀가 길에 구토를 하고 그것을 우연히 본 한나가 소년을 도와주면서 운명적인 사랑은 시작된다. 두 사람은 매일 만나 책을 읽고, 샤워를 한 뒤 사랑을 나누고, 한참 동안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만의 의식을 가진다.
한나의 농염한 육체와 손길에 익숙해진 미하엘이었지만, 소년은 정작 한나의 가족이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한다. 강렬하고 도발적인 에로티시즘 문장들은 한나의 불안감과 비밀을 암시하면서, 미하엘의 눈앞에서 한나를 사라지게 만든다. 갑자기 떠나버린 한나를 생각하며, 미하엘은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이 과연 진실한 사랑이었던지 고뇌하기 시작한다.
제2부에서 미하엘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 있다. 미하엘 베르크는 세미나로 간 법정에서 한나를 우연하게 다시 만난다. 법정 심리과정을 통해 한나의 숨겨진 과거가 밝혀진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으며, 자신의 문맹을 숨기기 위해 지멘스 회사에서 승진도 마다하고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 되었다. 한나가 미하엘로부터 도망친 것도 따지고 보면 문맹에 대한 한나의 수치심 때문이었다. 한나는 전차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려던 순간에 자신이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토로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법정에서 역시 문맹임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보고서를 자신이 작성하였다고 시인하여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제3부에서는 미하엘 베르크가 수감된 한나에게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주는 기나긴 세월이 묘사된다. 한나가 수감된 지 8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작된 책읽기 녹음은 그녀가 사면될 때까지 10년간 계속된다. 그러나 미하엘은 녹음테이프에 문학 작품을 읽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사적인 메시지는 넣지 않는다. 한 번도 찾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다. 한나는 석방 당일 새벽에 교도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미하엘이 찾아간 한나의 방에는 그녀의 메모들과 독서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글을 배운 뒤, 스스로 과거 나치시대의 자료들과 역사책들을 독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무지로 인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가를 깨닫는다. 그녀의 유언장에는 그녀의 모든 재산을 ‘문맹퇴치를 위한 유대인 연맹’에 기부하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작품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 본 문학치료
책 읽어주는 남자인 ‘나’는 한나를 만날 면 언제나 책을 읽어준다. 한나는 ‘나’가 책을 읽어줄 때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화를 내기도, 주인공을 비난하기도 한다. 배움이 없던 그녀에게 책 속의 내용은 바로 현재이며,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낭독 속에서 등장인물로 동화되어 등장인물처럼 이해하고 느끼며 스스로 문학적 현실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나 ‘나’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기다리며 좋아하던 한나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값진 시간이었다는 것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나’의 낭독을 좋아했는지는 책의 마지막에서도 여실히 밝혀지고 있다.
“나”는 재판정에서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에 주인공은 한나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카세트테이프와 책을 보내곤 한다. 그는 한나가 자신이 읽어주는 책을 보며 글을 배우고 읽고 쓰게 되는 것을 체험한다. 한나는 ‘나’에게 보고 느끼는 것을 편지로 쓰고 이야기하며 교도소생활을 한다. ‘나’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아도 그녀는 자신의 사소한 교도소일상들과 미하일이 보낸 책 속의 주인공들에 대해 그리고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공유한다. ‘나’역시 그녀의 편지를 보며 순수하게 작품들에 대해 평가하는 그녀의 신선한 평가에 깜짝깜짝 놀란다.
“뜰에는 벌써 개나리가 피고 있어.”, “올여름엔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서 기분이 좋아.”, “창밖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려고 새들이 떼를 짓는 모습이 보여.” 문학에 대한 그녀의 평은 대개 놀라우리만큼 정곡을 찔렀다. “슈니츨러는 멍멍 짖고 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죽은 개야.”, “켈러에겐 여자가 필요해.”, “괴테의 시는 예쁜 틀에 끼워놓은 조그만 그림 같아.”, “렌츠는 보나마나 타자기로 글을 쓸 거야.” 한나의 글에는 그녀의 생각이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글을 배운 뒤부터 그녀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치 전범으로 수용된 그녀이지만 모범수로서 석방을 받기에 이른다. 그녀의 방에는 많은 메모들과 독서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식하고 무지했던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한나라는 인물이 글을 통해, 특히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떠한 삶의 변화를 맞이하는가는 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배여 있다. 한나는 처음에는 아무런 지식을 지니지 않았던 평범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피하기 위해 언제나 숨어 지내고 도망 다녔다. 그러던 그녀가 미하엘과의 만남을 통해 문학과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상상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미하엘이 읽어주는 이야기들에 매료되면서, 그녀는 책 읽어주는 남자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표출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한나는 문학을 통해 글을 배우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한나는 문학을 접하고 글을 배움으로써, 자신의 죄 그리고 파시즘 폭력의 정체 등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이처럼 잠자고 있는 어느 영혼의 마음속에 어떤 새로운 불꽃을 지피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한나’의 히스테리증상의 근거
1. 콤플렉스를 가진 여성: 한나는 처음에는 배움이 없는 무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과잉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2.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캐릭터: 책 속에서 설명되는 한나는 예민한 여성이다. 미하엘은 그녀가 이기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한나가 드러내는 감정의 기복을 히스테리증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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