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우연히 에피는 크람파스라는 남자를 알게 됩니다. 크람파스는 케신 지역의 관리로서 여성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크람파스는 이른바 “바람꾼”이었는데, 결국 여주인공을 꼬드겨서 그미와 살을 섞게 됩니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크람파스에 대해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에피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묘하게 크람파스와 얽히게 됩니다. 크람파스는 기회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의 밀회가 밝혀지면, 끔찍한 결과가 일을 것이라고 여주인공에게 협박 아닌 협박의 말을 던집니다. 에피는 비밀리에 남자를 만나서 통정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이러한 짓거리 자체를 몹시 싫어하게 됩니다. 어느 날 인슈테텐이 베를린으로 전근되었습니다. 에피는 이를 몹시 기뻐합니다. 더 이상 크람파스를 만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피와 인슈테텐은 유유자적하게 베를린에서 지내며, 조화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로부터 약 7년 후에 인슈테텐은 우연히 편지를 정리하다가 서류함에서 편지 묶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들은 크람파스가 오래 전에 에피에게 보낸 편지들이었습니다. 인슈테텐은 자신의 자존심이 심각하게 상처 입게 되었다고 느낍니다. 증오심 내지 질투심이 그의 마음속에 솟구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람파스와의 결투만이 자신의 명예를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판단합니다. 결투 끝에 크람파스는 사망하게 됩니다. 문제는 결투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인슈테텐은 모든 게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한 것이며, 우스꽝스럽다고 여깁니다. 명예라는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슈테텐은 사회의 계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말 경의 시민주의의 생활방식은 20세기의 한국 사회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강제적 성윤리가 맹위를 떨치는 가부장주의 사회라는 게 공통적이지요. 인슈테텐은 에피와 이혼합니다. 그것은 말이 이혼일 뿐, 아내를 집밖으로 쫓아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에피의 부모는 자싱의 행복보다는 사회적 이목을 더욱 중시합니다. 그들은 이혼한 딸년을 반갑게 맞지 않고, 베를린으로 돌려보냅니다. 그후 에피는 베를린의 초라한 방을 구해서 하녀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미의 딸이 10세 되었을 때, 여주인공은 딸을 이혼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딸 아니는 친엄마를 무척 낯설게 여깁니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 인슈테텐에게 정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에피는 극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몸이 허약하게 된 에피는 딸이 다시 왔을 때 졸도합니다. 에피는 이제 건강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부모는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에피를 집으로 불러들여, 딸과 화해합니다.
에피는 남편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죽습니다. “그는 모든 경우 정당하게 행동했어요.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많은 선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고결한 태도 말이에요.”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깨닫게 됩니다. 『에피 브리스트』는 가장 불행한 영혼의 삶을 기술한 작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주인공들은 사랑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 비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다지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남녀는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인슈테텐은 질투심과 명예욕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파국으로 몰아갑니다. 그에게는 모든 도덕, 관습 그리고 법 등을 떨칠 수 있는 배포가 없으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령 에피는 고립된 삶 속에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으므로, 심리적 안식처를 필요로 했습니다. 굳이 크람파스의 품이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주인공은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이는 간통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폰타네의 작품은 19세기의 다른 간통소설들과 비교할 때 매우 황량하고 암울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사랑의 부재 (不在) 때문일 것입니다. 『보바리 부인』의 여주인공, 엠마는 북프랑스의 답답한 시골 그리고 점액질의 남편의 품을 벗어날 때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미는 몇몇 남자와 통정할 때, 일시적이나마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채털리 부인은 산지기 멜히오르와 만나, 성불구인 남편에게서 찾을 수 없는 커다란 오르가슴에 깊이 빠져듭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주위의 온갖 비난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애인인 브론스키와 재혼하려고 끝까지 발버둥 칩니다. 이러한 여주인공들은 일시적으로, 혹은 오랫동안 사랑을 느끼고, 이를 더욱더 오래 간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에피 브리스트』의 여주인공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행복감도, 순간적 황홀도 말입니다.
(끝. 감사합니다.)
참고 문헌: 임춘택: 용서와 화해의 문학 텍스트 다시 쓰기,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를 중심으로 in: 독어 교육, 86권, 2023, 61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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