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무한대의 이익추구, 엘리트주의, 자연파괴 등은 실증주의의 단선적 사고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협동, 절제, 평등 그리고 상생 등은 생태적 사고의 토대로 정립될 수 있다.” (필자)
“계급, 종파, 정당, 국적, 성, 인종, 나이 등과 같은 구분 그리고 차별 속에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de et impera’라는 지배자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필자)
친애하는 J, 우리는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제 5권에서 1940년대 이후의 문학 유토피아를 다루려 합니다. 이것은 평화 운동, 환경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과 결착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경쟁 지향적인 국가 내지는 국가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은 평화 운동을 촉발했습니다. 둘째로 지구 전체로 확장된 환경 파괴, 특히 핵에너지에 대한 비판은 환경 운동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남녀 불평등의 급진적인, 혹은 점진적인 비판은 여성 운동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의 문학 유토피아는 전체적으로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폭력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류는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국가적 폭력과 갈등보다는,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그리고 평화 공존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정치적 유토피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웰의 『1984년』이 1949년에, 생태주의 유토피아의 출발을 알리는 스키너의 『월든 투』가 1948년에 나란히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20세기 초반부와 후반부의 문학 유토피아의 경향은 첨예하게 분할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웰의 『1984년』 이후로 정치적 유토피아의 설계는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허버드 마르쿠제, 헬무트 셸스키 그리고 대니얼 벨 등은 “유토피아는 얼마든지 발전된 과학 기술로 보완될 수 있다.”고 천명하며, 유토피아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국가 시스템이라는 한 가지 측면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결정적인 하자를 드러냅니다.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새롭게 출현한 문제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을 추구한다는 특징을 고려할 때, 생태주의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 식량 문제 그리고 잘사는 국가와 못사는 국가 사이의 대립 등의 난제는 현대인에게 유토피아의 어떤 새로운 기능을 요청합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첨단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삶의 질은 나아졌으나, 거대한 범위에서의 빈부 차이가 출현하였습니다. 게다가 인구 폭발과 생태계 파괴 현상은 현대인에게 삶의 근원적 의미를 근원적으로 짚어보게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이 관건이었다면, 21세기에 이르러 “물구나무선 먹이 피라미드” (필자)를 복원시키는 과업이 동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시각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인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현대인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연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으나, 생태계 파괴 그리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코로나 19의 여파로 인하여 생태적 문제점 그리고 인간 사이의 제반 갈등이 얼마나 현대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결착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화와 상생과 결부된 사회적 삶의 틀을 마련하고, 이와 관련되는 새로운 윤리 내지는 예술적 성향을 재정립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필자는 하나의 생태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생태 공동체가 반드시 아나키즘에 근거한, 기존의 폐쇄적 단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 이후의 시대에 생태 의식을 실천하려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그룹 내지는 단체라고 광의적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핵가족은 아니지만, 대가족 공동체 내지는 종교적인 신앙 공동체도 얼마든지 차제에 하나의 튼실한 생태 공동체로 발전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새로운 사고일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서서히 성장한 실증주의의 단선적 사고를 연속적으로 비판해 나가야 합니다. 경쟁, 무한대의 이익추구, 엘리트주의, 자연파괴 현상 그리고 기술만능주의 등은 실증주의의 가시적인 사고 속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협동, 절제, 평등 그리고 상생 등은 생태적 사고의 토대로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인문학 그리고 문학예술의 본원적인 기능일 것입니다. 필자는 20세기 중엽 이후로 출현한 문학 유토피아를 분석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협동과 호혜, 근검절약과 절제, 남녀평등 그리고 상생과 나눔 등을 실천할 수 있는 생태적 삶의 가능성을 추적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은 반-학문적인 신정론 내지는 객관적 결정론 대신에, “역사 속에 도사린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Martin Buber)로 향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반계몽주의의 운명론이라든가 역사적 결정론은 “역사 속에 도사린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 내지 사회적 삶의 변화 가능성을 처음부터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유토피아에 포함된, 변화를 위한 역동적 사고 내지는 개방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생태 위기에 직면하여 새로운 인간형은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이 설정되어야 할까요?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형이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을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입견이란 계급, 종교, 정당, 국적, 인종, 성, 나이 등에 입각한 구분과 차별을 가리킵니다. 언젠가 로버트 오언은 이러한 토박이 속물들을 한마디로 “편견으로 가득 찬 지역적 동물the localised animal of prejudice”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Robert Owen: The Book of the new moral world 1842, August M. Kelly publishers: New York, 1970.) 자고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구분 내지는 차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닥나기들의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선입견입니다. 무지와 편견은 결국 광기를 낳고, 광기는 낯선 새로움에 대한 부정적 아집을 부추기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구분 내지는 차별이 주어진 현실의 고유한 가치라고 용인해 왔습니다. 가령 개인은 “나누어지지 않은 존재In-Dividuum”로 독립성을 지닌다고 하지만, 대부분 현대인은 여전히 고립되고 차단된 개체로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인간 동물은 진실로 사회적 존재로서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건강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지만, 영혼의 건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 동에 모이듯이 (三十輻共一穀)”, 영혼 역시 상호적 사랑에 의해 지탱하는 바퀴살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물심양면의 상호적 도움은 -크로포트킨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사랑과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과학 그리고 실증주의로는 명확하게 해명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DNA 속에는 한 인간의 모든 특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불교에서 말하듯이 “작은 먼지 속에는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一微塵中含十方)“.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는 특정인에 대한 가시적인 구분과 차별이 근본적으로 지배와 억압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구성체는 계급, 종교, 정당, 국적, 성별, 인종, 나이 등으로 나누고 구별하는 일련의 행동과 제도 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일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적 삶의 가능성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며, 올바른 인간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생태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두 가지 과업과 함께 제기되어야 할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이윤이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과 절제된 소비가 첫 번째 과업이라면, 바람직한 생태 사회의 삶을 예술적으로 선취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두 번째 과업이리라고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양해와 감사의 말씀을 남기려고 합니다.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은 동양 사상 내지는 한국의 정신사적 관점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여전히 과문한 필자는 이를 무람없이 서술했을 뿐, 심층적으로 그리고 체계를 갖추어서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후학들이 이 책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기를 바랍니다. 모르긴 해도 나의 책에서는 하자가 드러날 것이니, 독자들의 비판과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필자는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으나, 집필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고마운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무심한 간서치(看書痴)를 아무런 핀잔 없이 대해준 식솔들 그리고 울력의 강동호 사장님에게 큰절 한 번 올립니다.
장산의 끝자락에서
필자 박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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