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세영의 논문 “우상의 가면. 김수영 론”을 흥미 있게 읽었다. 논자는 김수영의 시문학이 지금까지 참여 문학의 영역에서 과도하게 우상화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몇몇 시작품에 나타난 결함들을 몇 가지 사항으로 해명하고 있다. 나는 이 논문이 지적하는 바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려고 한다. 나는 국문학도가 아니라 외국문학도로서 김수영의 작품들을 대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한국 문학이라는 토대 하에서 그의 시작품을 대하려는 게 아니라, 세계문학이라는, 보다 원시안적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김수영 시문학의 공과를 전적으로 용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수영 문학에 나타난 비판정신 그리고 문학에 대한 전체적 입장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서두에 분명히 밝힌다.
2.
논자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지적되지 않는 김수영 문학의 문제점을 여섯 가지의 사항으로 피력하고 있다. 첫째, 오세영은 참여시를 문학적 가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을 인용한다. 즉 시는 사르트르에 의하면 사회 참여의 도구로 이용할 경우 문학적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사회 참여의 도구의 차원에서 시 작품과 산문 작품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 일방적이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주장은 20세기의 프랑스라는 구체적 현실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입장을 미국 자본주의가 크게 좌우하던 냉전 체제의 50년대 및 60년대의 남한에 적용하려는 태도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시작품과 산문 작품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근대적 발상이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발표되는 시와 산문들은 서로 구분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표현 형식의 작은 차이를 차치한다면, 산문 작품이 더 난해한 경우도 허다하다.
3.
둘째, 오세영에 의하면 참여 문학을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논객들은 현실 개혁적이고 정치적이라고 한다. 참여 문학과 순수문학의 이론적 논의는 지금까지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논객들의 논의는 탁상공론으로 그치고, 논객들의 정치적 예술적 입장만을 재확인하게 해주었을 뿐 이렇다할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고로 문학의 언어란 미적 특성 뿐 아니라, 사고와 사상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한, 이념과 사상은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만 특정한 사회 개혁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김수영의 태도를 오세영은 혐오하는 듯하다. 사회 개혁과 공산주의에 대한 내적 거부감 내지 두려움은 지금까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로 하여금 가장 공정하고도 냉정하게 그것을 고찰하지 못하도록 작용해 왔다. 이 때문에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사회적 이상이 언제나 색안경의 대상으로 비쳐져 왔음을 우리는 지금이라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4.
셋째, 김수영의 시어는 오세영에 의하면 “거칠다”고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많은 부분 동의한다. 김수영은 미국의 독점 자본이 서서히 칼날을 뽑아 휘두르려던 비민주적인 사회에서 살았다. 그렇기에 그의 시어는 거칠고 튈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존재는 지진 발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시대의 계기 내지는 지침계” (Kunert)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시가 거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6.25 사변이 발발했을 때 한가하게 과거 신라 시대를 동경하며, 이를 노래한 서정주의 시집 “신라초”야 말로 시대착오적이지 않는가?
다른 한 편 시적 표현이 거친가, 세련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 자체 주관적 취향의 문제에 속한다. 가령 오세영은 김수영의 작품 “풀”을 수준작으로 평가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로서 “정갈한 표현”, “시적 마력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상상력” 등을 내세우고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이 경우 합당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엄밀하게 고찰할 때 주관적 취향에서 나온 판단일 뿐이다.
5.
넷째, 김수영의 시는 오세영에 의하면 “메시지 전달의 언어로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오세영은 어떤 전통적 문학 이론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인다. 가령 “시는 존재의 언어로 쓰여지고, 산문은 전달의 언어로 쓰여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통념적으로 내려오는 상투적 견해에 해당할 뿐이다. (“존재의 언어”라는 표현은 그 자체 모호하다.) 이에 대한 이유로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들고 싶다. (1) 시가 존재의 언어로 쓰여진다고 하지만, 시작품은 의미를 배제하려는 게 아니라, 대체로 한 가지 단선적 의미 전달만을 지양하려고 의도할 뿐이다.
존재의 언어라는 예술성도 언어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론적 특성을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다. (2) 오늘날 유럽에서 주류를 이루는 시적 경향은 직설적으로 명징한 의미 전달을 일차적 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시가 존재의 언어로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3) 산문은 전달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전달을 일차적으로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시작품보다도 더 난해하다. 초현실주의 내지 누보로망의 작품은 산문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6.
다섯째, 오세영에 의하면 “김수영의 의식 속에 재구성된 생활 잔영의 시들은 매우 난해하다.”고 한다.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수영의 시들 가운데 애매한 작품들이 더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모든 작품이 모두 함량 미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오세영은 추측컨대 김수영의 소시민적 푸념에 대해 메스를 가하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시에 나타난 소시민적 울분 내지 푸념" 등을 "시인 자신의 그것"과 결코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나는 왜 사소한 데 분개하는가?”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김수영은 작은 문제에 대해 분개하고 큰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소시민을 작품 속에 시적 자아로 설정하고 있다. 이 대목만으로써 우리가 김수영을 소시민적으로 울분을 터뜨리는 작가라고 어찌 함부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시적 자아는 시인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7.
여섯째 김수영의 시는 오세영에 의하면 “빈곤한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세영은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이성이 과학의 세계를 지배한다면, 시는 예술 혹은 종교적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오세영의 논리에 의하면 고트프리트 벤이나 카를 G. 융의 심령학적 잠꼬대가 시적 상상력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상상력이라는 용어는 문맥상 타당한 게 아니다.
만약 시를 사실과 체험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역사 기록 내지 신문 기사와 달리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문학의 가상적 예술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지,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인간 삶이 지향하는 제반 영역의 갈망에 대한 가상적 상상의 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문학의 상상력은 작가와 시인이 갈구하거나 경고하려는 가상적 상을 탁월하게 형상화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의 현실 체험과 구분되는 예술적 종교적 세계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세영의 논리에 의하면 모든 르포 문학이 함량 미달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르포 문학 작품을 수준 이하라고 단정할 수 없다.
8.
오세영은 김수영의 “풀”을 수준작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태도에서는 은유 표현 능력 내지 정갈한 문체 등만이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거대한 뿌리”야 말로 김수영의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시작품 작품인 것 같다. 비록 그의 언어는 거칠지만,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은밀히 묘사하고 있는 시인이 꿈꾸는 가상적 현실 및 여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이 상세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상기한 시어 속에는 비록 국수주의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 1세계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에서 김수영이 갈망하는 상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고 있지 않는가? 이는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예술적으로 투영한 바람직한 상 내지 경고로서의 상으로서의 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은 표현이라든가 문체 내지 문학적 형식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내적으로 갈구하는 더 나은 삶에 관한 상이라는, 주제상의 측면에서 논의되는 성질의 것이다.
9.
지금까지 사람들은 오세영의 주장대로 김수영의 문학을 부분적으로 우상화하여 고찰해 왔다.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오세영의 발언이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즉 김수영은 “자신의 생각으로는 불온한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그것을 불온한 것으로 단죄할까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서랍 속에 넣어두는 심약한 시인이다.” 어디 김수영만 그러한가? 비용, 하이네, 브레히트 등 수많은 위대한 시인들이 김수영의 경우와 유사한 이유에서 제각기 책상 서랍에 시를 오랫동안 보관해 두며 살았다.
시인은 사고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불온해야 하지 않는가? 나아가 시인은 자고로 권력 앞에서는 처음부터 그 자체 미약한 존재이다. 나는 어떠한 이유에서 오세영이 힘없는 시인의 인간적 두려움을 강조하는지 잘 모르겠다. “김수영이 결코 지사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부언하건대 만에 하나라도 김수영의 시에서 어떤 자가당착적 요소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한 이유를 시인 개인에게서 찾지 말고, 무엇보다도 시대의 자가당착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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