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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3)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필자 (匹子) 2024. 4. 17. 10:33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고통스러운 자해 행위: 다음 날 에리카는 몸속에 칼 한 자루 감춘 채 발터가 다니는 기술 대학으로 향합니다. 그를 죽일지, 아니면 그를 연인으로 되찾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발터가 눈에 뜨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에리카는 그가 어느 여대생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봅니다. 에리카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릅니다. 그미는 칼을 꺼내어 자신의 어깨를 찔러버립니다. 어깨에서는 피가 솟아납니다. 피 흘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그미의 모습은 마치 짝 잃은 미친 비둘기 암컷처럼 보입니다.

 

11. 노이로제 환자: 소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요? 옐리네크는 에리카라는 인물을 통해서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한 인간의 복종과 심리적 굴복이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기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일견 포르노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키지만, 근본을 고찰할 때 우리는 주인공의 비정상적인 심리 그리고 그것이 태동하게 된 배경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에리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심리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영혼입니다. 그미는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게 살아가는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에리카는 노이로제 환자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미는 자신의 질병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을 부추기는 어머니의 욕심은 한 인간의 프시케를 서서히 망가뜨려 왔습니다. 에리카는 오로지 미래의 성공만 바라보며 달리는 자동차입니다. 주위에 얼마나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리카의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미의 얼어붙어 있고 경직되어 있는 몸과 마음을 다른 상태로 바꾸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12. 가부장적 시민 사회의 전형적 속물로서의 발터: 여기서 우리는 발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에리카가 다른 여성들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고 접근한 사내입니다. 학문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탁월함을 드러내기는커녕, 대충 학교 다니면서 삶을 즐기려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문제는 그가 가부장적 시민 사회의 관습을 은연중에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적어도 남자라면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행위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험은 사내에게 꼭 필요한 연애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발터입니다.

 

발터는 에리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미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에리카를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의 성적 욕망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만약 발터가 정말로 사랑의 능력, 이성 그리고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라면, 에리카와 오랫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누거나 주인공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작가는 발터로 하여금 에리카의 성을 유린하게 함으로써, 남성적 권위주의의 폭력이 얼마나 이기적인 욕구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13. 성공을 위한 노력은 사랑의 삶을 망치게 하는가? 친애하는 E, 주제와 관련하여 여기서 또 한 가지 다른 문제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한 인간이 성공을 거두려면,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는 조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에리카는 경제력도, 권력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오로지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 마구 호령하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생활비를 필요로 합니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모든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할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돈과 남성적 권력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에리카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성이 훌륭한 예술가로 성공을 거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요? 신분 상승을 위해서 소시민, 그것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피나는 노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나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개인 한사람의 영혼을 서서히 병들게 하고, 그의 삶을 불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이게 바로 작품이 제시하는 놀라운 역설입니다. 옐리네크는 바로 이러한 역설적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에 『피아노 치는 여자』는 심리 치료에 필요한 소설이며, 그 속에는 사회학적 차원에서 어떤 완강하고 집요한 페미니즘의 전언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