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함석헌의 시 (1) "내 마음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필자 (匹子) 2023. 2. 13. 11:29

: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의 시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이 설레는 까닭은 작품 속에 강인한 목표 의식과 도덕성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시 해석이 어려운 까닭은 개인사와 한국 역사가 용해된 포괄적 해석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 이해할만 하군요. 시작품 이해에 있어서 일단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일차적으로 이해하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함석헌의 삶을 깊이 파악하려면, 두 권의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치석의 『씨알, 함석헌 평전』(시대의 창, 2005) 그리고 김성수의 개정판 『함석헌 평전』(삼인 2011)이 바로 그 문헌입니다.

 

: 한 번 참고하겠습니다. 함석헌의 삶은 일제 강점기와 분단 시대로 나누어집니다. 함석헌은 두 시기에 열정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나에게는 1970년대에 『씨알의 소리』를 읽는 것은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습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함석헌 선생의 삶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시지요?

: 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서, 1920년부터 4년 동안 오산학교에 다녔습니다. 그곳의 교장은 다석 류영모 선생이었습니다.

 

: 아 바로 이 시기에 다석과 조우했군요.

: 그렇습니다. 류영모는 사회적으로 활동한 분이 아니라, 평생 칩거하면서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종교사상은 『다석 일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외에도 조만식, 이승훈, 안창호 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 그 이후에 함석헌은 자신의 친구, 김교신 (金教臣)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다녔다고 하지요?

: 두 사람에게 기독교 사상을 가르친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였지요. 그는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내면으로 받아들이지만, 허례허식적인 예식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사제들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이 점에 있어서는 우치무라 간조의 입장은 류영모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교회는 기독교 부흥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 김교신과 함석헌은 1927년 귀국하여 『성서조선』을 창간했지요?

: 그렇습니다. 그들의 탈권위주의적 기독교 사상은 김교신에 의해 민중적 저항적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켰지요. 함석헌의 친구, 김교신은 민중 신학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입니다.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성서조선』 불온서적으로 규정하고,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체포 구금시켰습니다. 그런데 김교신은 해방이 될 무렵에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지요.

 

: 함석헌이 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 무렵입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 글쎄요. 해방 후에 자신의 고향에서 용천군 자치 위원장으로 일했으나,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으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다. 그 내가 감히 시를 쓰다니,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한 것이 아니다.”

 

: 참담한 발언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자신이 시를 쓴 것은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더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 얼핏 보면 자격지심으로 인한 푸념처럼 들립니다만, 푸념이 아닙니다.

: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라.”는 솔직한 고백은 시와 문학을 폄훼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 속에서 찾아내려는 생존의 절실함에 기인합니다. 문학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면 그것은 살림이고, 생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자신의 글은 시 아닌 시라고 천명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로군요.

: 그렇습니다. 작품은 시인의 감정이 여과된 추출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마음에 칼질하다가 분출해낸 자신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김조년 교수는 함석헌의 시 창작이 “자기의 존재와 바꾸는 일이며, 이 세상과 맞바꾸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말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