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명저 소개) 임철우 외: 행복한 인문학

필자 (匹子) 2020. 9. 26. 07:11

 

 

임철우, 우기동, 최준영 외 지음: 행복한 인문학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인문학 수업, 이매진 2009.

 

나는 언젠가 인문학을 된장찌개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인문학 공부는 마치 필요없는 학문처럼 보인다. 특히 이공계 학자 내지 사이버네틱스를 전공한 사람들은 인문학자들을 마치 쓸모없는 자들로 매도하기도 한다. 항상 책만 읽고, 빈둥거리거나, 걸핏하면 반정부적인 발언을 일삼는 기생충들이라는 것이다. 그래, 그들의 눈에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만이, 진정한 학문처럼 느껴질 뿐이다. 예컨대 복통을 앓는 환자가 소화제를 먹으면, 배탈을 (어느 정도) 극복하듯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학문만이 중요하다는 게 그들의 논지이다. 

 

아마 이공계 학자들도 된장찌개를 자주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음식이 몸의 어디가 유용한지 명확히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된장찌개는 마치 보약처럼 은근히 신체의 건강을 도모하지만, 신체나 특정한 질병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마치 된장찌개 내지 보약과 같이 작용한다. 그것은 당의정 알약과 같은 당장의 직접적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된장찌개는 사람으로 하여금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게 한다. 굳이 이 자리에서 의 효능을 설파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해 보라. 인문학자는 현재, 과거, 미래를 관통하는 어떤 방향성과 인간 삶의 목표를 제시한다. 비록 남들 눈에는 혼자 가만히 앉아서 깨작깨작 책이나 들척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문학은 개인과 사회에 그저 간접적으로 미미하게 영향을 끼치지만, 인문학의 영향력은 오래 지속된다.

 

노숙자들, 노인들 그리고 가난한 소시민들 앞에 인문학자들이 발 벗고 나섰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경기광역자활센터, 노원성프란시스대학, 관학인문대학 등을 통해서 가능했다. "행복한 인문학"은 인문학자들의 자발적 강의 그리고 배우려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청취로 인해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이러한 결과 물이 바로 "행복한 인문학"이다. 경기광역자활센터 등에서 배우는 분들은 노숙자, 노인, 소시민들이지만, 정작 무언가를 배운 사람은 강의를 맡았던 분들이라고 한다.

 

돈과 권력은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취업에만 신경 쓰도록 고달픈 삶을 강요한다. 대학생 역시 미래의 불안을 느끼며, 취업에 도움을 주는 과목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려고 한다. 대학에 가보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기 과목의 강의실은 터져나가지만, 비인기학과의 과목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다. 순수 학문의 과목은 외면당하고, 실용 학문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수는 터져나간다.  한국의 대학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학문, 인문학은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이 책의 강사님들은 강의를 통해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고 토로한다. 배우는 자가 강사들에게 무언가를 깨우쳐주고, 강사들은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회 밑바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리라.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진리를 배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겨레 신문사 한승동 선임기자의 평에 의하면 "존재의 소리에 목말라 하고, 영혼의 물음에 만감한 소외된 삶이야 말로 인문학 혁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대하면서 진정으로 학문하는 곳은 대학이 아니라, 경기광역자활센터, 노원성프란시스대학, 관학인문대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