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수강생들에게 감사드리면서......
.................
1강

마르틴 루터의 업적은 흔히 말하기를 종교 개혁의 운동 그리고 성서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뷔르템베르크 성당에 붙이고 강하게 항의합니다. 신의 은총은 면죄부 판매를 통해서 얻을 수 없다는 게 루터의 지론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름스 성당에서 문초 당할 때 죽음의 위협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때부터 루터는 변절하여 철저히 기득권의 편에 서게 됩니다.
나중에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는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알았으나, 그리스어를 몰랐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루터는 “72인의 그리스어 구약성서 Septuaginta”를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헌은 히브리어-아람어 성경을 고대 그리스 일상 언어로 번역된 것인데, 루터는 이 책을 거의 무시했습니다.
2강

위의 도표는 루터와 뮌처의 사상적 종교적 특징을 비교한 것입니다. 루터가 성서 이해를 통한 신의 은총을 중시했다면, 뮌처는 기도를 통한 신의 계시를 추구하였습니다. 전자가 오로지 신의 말씀을 접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중요한 관건으로 여겼다면, 후자는 내면을 정화함으로써 성령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기독교의 방향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교종과 선종의 차이처럼 느껴집니다.
토마스 무르너 (Thomas Murner, 1475 – 1537)는 알자스 출신의 프란체스코 수사였는데, 종교 개혁 운동에 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3강

사진은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붙인 뷔르템베르크 성당의 정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째서 루터가 나중에 보름스 성당 앞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 자신의 주장을 꺾고, 수구 보수주의로 신속하게 선회했을까요? 이 점이야말로 루터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mystery)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루터는 철저하게 체제옹호적 자세를 취하면서 폭동에 가담한 농부들을 날강도 내지는 역도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루터의 성서 번역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루터의 성서 번역을 통해서 독일어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루터는 중부 지방의 “마이센 어”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서 루터는 하루 종일 우물가를 서성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그는 여자들에게 치한으로 몰린 적이 있었습니다.
4강

루터는 백색 수도회 (Zisterzienser) 교단의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 (1499 – 1552)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미는 파계하여, 21년 동안 루터와 살았습니다. 그미는 귀족 출신이었고, 3남 3녀를 출산했습니다. 루터의 사생활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그가 반유대주의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루터가 체제 옹호주의자이며, 인종주의자의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은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루터는 독일 농민 혁명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5강

도표는 루터와 뮌처의 사상을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을 재차 비교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인간 존재가 처음부터 죄인이라고 못 박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사도 바울의 사고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용인하고 반성해야만 죽어서도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자청해서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뮌처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뮌처에 의하면 회개 그리고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개혁하는 노력이라고 합니다.
6강

믿음과 진리를 쟁취하려는 용기는 수도의 삶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직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뮌처는 두 명의 사상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조아키노 다 피오레 (1130 – 1202)는 역사 신학자로서 천년 왕국의 메시아사상을 전파한 분입니다. 예수의 사후 천 년이 지나면, 메시아가 도래하여, 가난하고 불행한 인민을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메시아사상은 그후 신앙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자극제로 작용하였습니다.
요한네스 타울러 (1300 – 1361)는 독일 출신의 기독교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는 기도를 통한 성령과의 만남을 강조했습니다. 흔히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어쩌면 교회와 수사 계급은 불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기독교인이면, 혼자서 성서를 읽고 기도하면서, 성스러운 영혼과 직접 만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타울러는 믿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에크하르트 선사 그리고 기독교 평신도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7강

토마스 뮌처의 강렬하고도 격정적인 삶은 동학 혁명의 과정을 유추하게 합니다. 1520년에 뮌처는 가난 그리고 신앙 사이의 관계를 직시합니다. 현세의 삶은 믿음과 관련되며, 저세상의 행복은 부차적인지 모릅니다. “부활 ἀνάστασις”은 “다시 태어남”이라는 의미보다는 더 나은 현세에서의 찬란한 삶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부활은 바로 갱생(更生)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행위(侍天)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행위입니다.
1522년 뮌처는 루터와 사상적으로 결별합니다. 그 이후는 루터가 인민, 다시 말해서 하층민의 삶과 안녕을 도모하는 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뮌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의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키우는 행위(養天)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도모하는 행위입니다.
뮌처는 독일의 제후들 앞에서 다니엘의 말씀을 설교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제후들은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아귀와 같은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모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밖에 없음을 절감합니다. 1524년 그는 독일 남부의 농민들 그리고 재-세례파 사람들과 함께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위(體天)는 불의를 척결하는 투쟁의 행위입니다.
8강

뮌처는 처음에는 신앙 그리고 종교 개혁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득권이 사회 경제적 갈등과 수직 구도의 빈부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신앙을 악용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간파하는 순간 뮌처는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밖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카를 카우츠키 Karl Kautsky는 독일 농민 운동에 관한 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즉 1525년 독일 농민 전쟁은 독일 사회주의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종교 개혁 운동이기 때문에 유럽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Karl Kautsky: Die Vorläufer des neueren Sozialismus, 1895). 이러한 주장은 토마스 뮌처의 태도 변화를 고려할 때 수정되어야 마땅합니다. 독일 농민 혁명은 종교 개혁 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9강

사회주의 혁명은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폭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폭동은 무력으로 진압되어, 육천 명의 노예는 로마로 향하는 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옳든 그르든 간에 사회의 재화가 불평등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경제적 시스템으로서 재화의 공동 생산 그리고 재화의 공동 분배로 영위되는 사회 제도입니다. 이는 주어진 현실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사회 보장제도, 노동 조합 운동, 공동체 등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국가 폭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는 마이신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
'24 신학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로박: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0) | 2026.02.26 |
|---|---|
| 서로박: (2) 타우베스의 혼종(混種)의 정치신학 (0) | 2024.11.21 |
| 서로박: (1) 타우베스의 혼종(混種)의 정치 신학 (0) | 2024.11.19 |
| 블로흐: (3) "굴종의 회개인가, 성령의 수용인가". 루터 비판 (0) | 2023.05.03 |
| 블로흐: (2) "굴종의 회개인가, 성령의 수용인가" 루터 비판 (0) | 2023.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