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1939년 말에서 1940년 초에 18개의 테제로서 약 11페이지로 씌어졌다. 작품에서는 신학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 역사주의, 특히 사민당 사람들의 진보적 사고 등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벤야민의 작품은 제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벤야민은 그레첼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사 철학 테제를 20년 동안 마음속에 보존해”왔다고 기술하였다. 특히 “통행로 (Passagen)” 연작을 집필할 무렵 자신의 역사 철학 테제를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테제에서 벤야민은 신학 그리고 유물론의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를 장기 자동기계 장치로 비유한다. 신학은 난쟁이에 비유되고 역사적 유물론은 인형에 비유된다. 인형은 시합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지만, 실제로 인형을 조종하는 자는 테이블 아래에 숨어 있는 난쟁이다. “사람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명명하는 인형은 항상 승리한다고 한다. 인형이 신학을 고용할 경우, 인형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모든 것으로써 다 받아들인다. 신학은 오늘날 추하고 작은 몰골로 변해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은 결코 없다.”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 테제는 유물론의 역사에 대한 벤야민의 관찰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과거는 결코 폐쇄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과거는 결코 고착된, 불변하는 전통의 구성 성분이 아니라, 체제에 발견되어야 하는 역사적 내용을 소지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역사는 현재 그 자체 주어진 사항을 통하여 구원에 관한 어떤 요구사항을 지니고 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요구 사항은 오로지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서, 오로지 어떤 특정한 순간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현재를 사라지도록 위협하는, 하나의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이기 때문이다. 현재란 상 속에 떠올린 무엇으로서 인식되는 법이 없지 않는가?”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은 경향적으로 고찰할 때 지배계급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따라서 모든 현재 속에 내재해 있는 “미약한 메시아의 힘”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사적 유물론자는 지배 계급을 고수하는 역사 서술의 경향을 깡그리 배격해야 한다. 벤야민은 지금까지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승리자들을 위해서 체제 순응적 역사를 기술하였으며, 문화적 유산을 하나의 전리품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일곱 번째 테제에서 유물론자가 행하는 정반대 방향의 진행 방식에 관한 언급으로 끝난다. “그 (유물론자)는 역사를 역으로 빗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생각한다.”
여섯 번째 테제는 폴 클레 (Paul Klee)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를 역사의 천사로 해석한다. 그림 속의 천사는 자신의 얼굴을 과거로 향하고, 있다. 천국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그의 얼굴을 뒤로 돌리게 하고, 미래로 충동한다. 다른 한편 천사의 앞에서는 폐허의 더미가 하늘 위까지 솟아오르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명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 여기서는 진보에 대한 비판이 표현된다. 이러한 비판은 열 번째 테제, 열한 번째 테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사회민주당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사회 민주당은 칼뱅 등의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공짜로 주어져 있는” 자연을 철저히 맹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파시즘을 방해하기는커녕, 파시즘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 시대의 유산 Erbschaft dieser Zeit에서 언급하는 비동시성 이론과 근본적으로 같은 근원을 지니고 있다.
제 열두 번째 테제 그리고 열세 번째 테제는 다음의 사항을 강조한다. 즉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누구보다도 억압당하는 계급일 수 있다. 이는 “해방된 손자”가 아니라, “억압 당하며 살아가던 선조”를 고찰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 민주당은 잘못된 진보 개념을 지니고 있다. 사민당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대를 관통하여 스스로 움직여나간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 진보란 사민당 사람들에 의하면 완전으로 향하여 끝없이 향상되어 나가는 걸음걸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벤야민은 14 번째 테제로부터 18번째 테제까지의 글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유물론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자는 “언젠가 ... 있었다.”라는 논리 대신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영속성을 파기해야 한다. 혁명의 시간은 과정이 아니라, 멈추어 서는 것을 뜻한다. 가령 파리 사람들은 칠월 혁명 이후에 시계탑을 박살내지 않았는가? 이렇듯 사람들은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 즉 혁명을 감행하기 위하여 시간을 멈추게 해야 한다.
과거의 무엇 그리고 현재의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단 한 번의 상태는 메시아주의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지금의 시간 Jetztzeit”이다. “지금의 시간”은 유대 철학에서 말하는 “생각해냄 Eingedenken”이라는 의향과 일치되는 것이다. 여기 “모든 순간 (秒)은 구세주께서 들어설 수 있는 작은 현관이었노라”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라.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자는 어떤 응축된 시간, -에크하르트 선사의 표현을 빌면- “고정되어 있는 지금 nunc stans”의 순간을 스스로 체험하려고 한다.
신학 그리고 유물론 사이의 공동 유희는 상호 배움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하나는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특성 내지 구원의 필연성이며, 다른 하나는 혁명적 투쟁의 필연성 내지 맑스주의적 예외적 상황의 필연성이다. 이에 첨가되는 것은 블랑 (Blanc), 소렐 (Sorel) 그리고 바쿠닌 (Bakunin) 등의 아나키즘 전통일 것이다. 벤야민은 메시아의 세속적 구원을 맑스가 말하는 계급 없는 사회로 파악하였다. 사회 민주주의, 당시의 러시아 상황 그리고 19세기의 유럽에서 파생된 사상 등은 벤야민에 의하면 계급 없는 사회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파시즘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의 승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변증법적 역사의 구성은 벤야민에 의하면 현실 정치에 그대로 대입되는 게 아니라, 현실 정치의 실체에 대한 지침으로 원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벤야민은 무엇보다도 파국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의 싹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림들, 유사성, 비유 등이 동원되고 있다. 이로써 이론과 실천의 결합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일원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벤야민은 생전에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발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고는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이 잘못 이해될 소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자기 쪽에 유리하게 벤야민의 글을 수용하고 있다. 가령 헤닝 귄터 (H. Günther), 위르겐 하버마스 (J. Habermas)는 벤야민의 글을 반계몽적이라고 해명하였다. 이에 반해 크리스토프 헤링 (Chr. Hering), 한스 디터 키트슈타이너 (H. D. Kittsteiner) 등과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벤야민의 글을 마르크주의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의 구원으로서의 유물론적인 역사 구성을 현재를 혁명적으로 변모시킬 찬스로서 실천할 수 있는가? 벤야민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통행로” 연작에서 은근히 무언가 암시해주었다. 만약 누군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어떤 정치적 실천에 관한 직접적 지시 사항을 찾으려 한다면, 그는 실패를 맛볼 것이다. 왜냐하면 (롤프 티데만이 말한 대로) 벤야민의 신학적 은유는 토론의 언어에 의한 하나의 해결책을 철저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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