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집니다.)
만약 낮의 인간은 멍한 상태로 축 늘어져 있고, 두 남녀가 밤의 축제적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선율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단호하고 경직된 리듬이 이어지는데, 이는 이졸데의 부끄러운 마음과 트리스탄의 당당함을 대신 말해준다. 제2막에서는 강한 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진다. 닻은 꺾이고, 방향타는 풍랑에 넘실거리며, 돛과 돛대는 거센 바람이 휘날린다.
세계, 권력, 광채, 명예, 기사도, 우정 등과 같은 낮의 모든 가치는 마치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꿈처럼 파손되어 있다. 일순간 가장 비밀스러운 나라로 향하는 항해 길이 열린다. 사악한 인간, 멜로트는 요란한 낮의 모티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누가 나를 감히 조롱하는가?” 두 번째 막이 열리고 분위기는 급작스러운 간격으로 차단되면서, 마치 하나의 채찍질과 같은 강하고 힘찬 리듬이 느껴진다. 화음 섞인 리듬이 사라지면서 느릿한 밤의 아다지오가 시작된다. 조용한 선율은 마치 어둠이 영원이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만약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죽는다면, 이승과 저승이 어떤 동경이라는 단단한 연결고리로 묶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바그너는 방황하는 파르지팔을 어떤 깊은 심성을 지닌 채 구월을 찾는 자로 판단하였다. 어쩌면 그는 파르지팔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시켜서, 중태에 빠진 트리스탄을 도울 수 있도록 조처했을지 모른다.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어느 가옥 안에는 흐릿한 빛이 반사되고, 미약한 음이 울려 퍼진다. 사랑의 욕망, 생명을 새롭게 탄생시키려는 의지는 –이른바 짝짓기와 같은 지상의 종족 본능과는 똑같다고 말할 수 없는데-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일순간 나이 든 현인이 나타나, 죽음 앞에서의 동경을 노래한다. 두 남녀가 갈구하는 바가 실현되기 전에 죽어서는 아니 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는 낮에 머무는 이졸데 그리고 소름 끼치는 밤의 제국에 머무는 트리스탄이 서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예언을 설파한다. 왜냐하면 낮과 밤은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가장 깊고 이국적인 음이 우리의 귀에 울려 퍼진다. 음은 두 남녀가 어긋남의 마지막 장소에 따로 머물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음이 원래 한 가지 사항만을 지적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구속과 한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이때 두 남녀가 흐릿한 빛 속에서 서서히 멀어진다는 장면은 무척 특이하게 보인다. 깊고도 둔탁한 음은 그들에 관한 명료한 무엇을 전해주지 않는다.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 그리고 “트리스탄”이라는 고유한 개념이 말해주듯이 (역주: “트리스탄”은 “trist”, 즉 “고독한, 쓸쓸한”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트리스탄의 자아는 불충분한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이졸데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 혹은 맹점 내지는 빠져 있는 자아의 일부를 채워 넣으려고 작심했는지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바그너는 이졸데라는 이름을 “죽음-사랑-합일”을 상징하는 신화적 음향으로 활용한 바 있다.), 바그너의 음악은 상태 내지는 개념으로서의 밤의 어두움을 전체적으로 이어 나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벽의 여명은 비록 멀리 위치하지만, 더 이상 밤의 시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비록 트리스탄의 음악은 지금까지 지상 그리고 과정과 관련되는 밤의 시간을 연주했지만 말이다. 이곳저곳에서 광기의 마지막 흔적이 번쩍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소리 없는 알록달록한 그림자의 꿈, 어떤 종교적인 삶, 사랑으로 인한 죽음, 사랑의 꿈, 기적으로 뒤덮여 있는 열정, 서정적으로 연속되는 메타 연극의 찬란한 후광 등을 생각해 보라. 이것들은 근접 불가능한 무엇으로서 보편성과 사랑, 이와 유사한 형체 없는 핵심 공간 등과 같은 전망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래, 자아가 그렇게 근본적으로 폭파되고, 그렇게 결정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전된 적은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 “꿈속에서 네가 나타나듯이, 나 역시 너의 꿈속에서 출현하네.”
심장 속의 타자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라면 “나”는 타자 속에서 태어나는 하나의 상이다. 이는 타자 속에 자아가 생동하고 있다는 낯선 느낌의 서정시가 아닌가? 이러한 감정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사랑으로 맺어주지만, 동시에 서로 멀리 떨어질 수 없게 만든다. 함께 하는 영혼은 그들의 면모 그리고 형체를 식별하지 못하게 하고, -쇼펜하우어가 인도에서 깨달은 음악의 대상 이론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신 존재 내지는 루시퍼 존재를 주체 밖으로 추방한다. (역주: 쇼펜하우어는 인도 철학이 말하는 개체적 자아의 경계가 근원적으로 허상이라는 주장을 수용했다. 이는 음악에 관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음악 감상 시 자아 소멸,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은 음악을 통해서 보편적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인도 철학의 “비-이원론 Advaita”과 상당히 가깝다. 이는 “그것이 곧 너다. Tat tvam asi”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 주체가 추방되면,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은 바로 –마치 세계의 숨결이 바람처럼 유동하는 우주 속으로 가라앉아, 익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변하듯이- “브라흐만 Brahman”이라는, 아시아의 낯선 보편적 존재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바그너 음악에서 드러나는 밤의 분위기는 텅 빈 두 손으로 멍하니 서성거리는 양태를 표현하고 있으며, 트리스탄과 파르지팔은 스스로 서정적 후광을 지니지만, 결국 연극을 초월하는 서정적 자아를 열정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모차르트의 동화 오페라는 대상의 존재론적 성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바흐의 수난곡 역시 아담을 제거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처절한 비극의 서정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음악의 상부에는 어디서든 간에 주도적으로 아다지오를 통해서 기독교의 깊고도 고요한 광채가 은은히 비치고 있다. 동경이라는 과정의 배후에는 이런 식으로 완전한 영혼의 휴식이 자리하고 있다. “성스러운 음악 musica sacra”으로서의 바흐의 푸가는 형이상학적 아다지오이며, 그 자체 공간으로서의 음악이다. 그것은 성령이 자리하는 자아의 음악이며, 최상의 질서를 간직한 건축학적인 대위법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바그너의 음악이 지닌, 보편성과 전체성이라는 깊은 비-기독교적 신비주의 때문에, 궁극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역주: 바그너의 예술 속에는 블로흐에 의하면 오로지 기독교 사상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다양한 사상적 토대가 혼재되고 융합되어 있다고 한다. 1. 북구의 신화, 2. 쇼펜하우어의 철학, 3. 인도 및 불교 철학, 4. 독일 낭만주의 등이다.).
누군가 예술의 영역을 매개로 다른 세상에 존재했다면, 더 이상 맨정신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모든 피가 발아래로 쏟아진 것처럼, 눈길은 머나먼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트리스탄 역시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낯선 존재로 머물고 있다. 하룻밤이 마치 500년처럼 느껴졌다. 그는 선상(船上)에서 마르케 왕을 가리키면서 시종, 쿠르네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구의 왕인가?” 그의 말에는 마치 그가 다른 왕을 섬긴 것처럼 냉담함이 깃들어 있다. 트리스탄은 아버지의 성, “키레올”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지금 내가 콘월에 있단 말인가?”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오, 왕이여, 당신의 물음에 답할 수 없어요.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면서 트리스탄은 멜로트와 남자들을 응시한다. 말하자면 마르케스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굴욕과 죽음의 죄를 서서히 인지하기 시작한다. 동정심과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그날 밤의 기괴한 경험의 상이었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속이는, 단순한 천박함을 통해 거칠고 의미 없는 낮의 유령 그리고 아침의 꿈이 아닌가? 여기서 빛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고, 신비로운 역사는 마치 반음계처럼 폭넓게 사라진다. 첫 번째 비가시적인 무엇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두 번째 그것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랍비, 아키바 Akiba는 자신과 동일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역주: 랍비 아키바는 기원후 2세기에 살았던 신비주의자인데, 로마 제국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아가 서」 해석을 통해서 신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사랑을 구명하려고 했다. ). 트리스탄이 지새던 밤은 세상에 더 이상 찬란한 아침을 기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끝. 감사합니다.)

'10 음악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블로흐: (1)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0) | 2026.05.14 |
|---|---|
| Ian Anderson의 신과 함께 추는 12개의 댄스 (0) | 2026.05.10 |
| 블로흐: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 (0) | 2026.05.09 |
| 블로흐: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 (0) | 2026.05.05 |
| 블로흐: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 (0) | 2026.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