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현재의 삶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한스 피츠너 Hans Pfitzner는 알록달록하고 세심한 꽃이라면, 막스 레거 Max Reger는 공허하고 위험한 음악적 능력을 드러내는, 거짓된 자라고 평했다. (역주: 한스 피츠너 (1869 – 1909): 독일의 작곡가. 반유대주의의 입장을 표명했다. 피츠너의 작품은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1902/03년에 작곡된 그의 두 번째 현악 사중주는 말러로부터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토마스 만은 1917년 10월에 발표한 짧은 에세이 "팔레스트리나"에서 이 오페라에 대한 찬사를 보냈는데, 이 에세이는 나중에 확장되어 그의 저서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에 포함되었다. 막스 레거 (1873 – 1926) 독일의 작곡가. 레거의 중요성은 그의 생전에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다른 작곡가들보다 훨씬 더 칭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전통적 음악계는 그를 "속물"이라고 명명하면서 적대감을 부추기곤 하였다.)
특히 레거는 자신이 얼마나 교양이 없는지 잘 모르고 있다. 가령 그는 왈츠를 작곡할지, 아니면 파사갈리아를 작곡해야 할지, 혹은 자신이 죽음의 섬에 관한 음악을 탄생시켜야 할지, 아니면 100번째의 시편을 음악 작품으로 남겨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역주: 파사칼리아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이자 변주곡 형식으로, 대개 3박자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단조이며 부드럽고 애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음악적인 음과 문학의 언어의 근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할 때도 있다. 레거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과는 전혀 질이 다른 모든 음악적 방향을 신뢰할만하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천성적으로 이류 내지는 변주 음악가는 언제나 형식적 모방이라는 궤적에서 벗어나기 못하기 때문이다. ᅟᅳᆨ렇기에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는 더 나은 질서의 숙련된 기술만을 견지할 뿐이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연속적으로 끔찍한 노여움만을 하나의 근원으로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정적이고 엄격한 유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아우라를 제공한다. 음악적 위대함을 느끼고 즉시 이해하기에 우리의 귀는 어쩌면 충분하지 않을지 모른다. 말러는 지금까지 여전히 중요한 지휘자로만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신문 가자들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다음과 같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즉 말러가 과연 작곡가로서의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가? 그의 대여섯 개의 교향곡은 화음을 다루면서 어설프게 배워나가는 학생의 습작품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역주: 작곡가로서의 구스타프 말러의 위상은 사후에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일반 대중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무관심, 이해 부족, 혹은 거부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후기 교향곡 작품(대표적인 예로 12번과 15번 교향곡)에서 그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의 교향곡은 제대로 연주되지 않았다. 만약 말러의 교향곡이 드물게 공연되면, 청중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침묵을 지키곤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말러 음악에서 냄새 풍기는 유대적 특징이라든가, “거짓된 거인주의 Scheintitanentum”에 관해서 천박하게 지껄일 뿐이다. 그냥 움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빗자루 같은 속물들은 자신과는 예술적 취향이 다른 말러 음악의 진지한 순수성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렇지만 상기한 사항은 말러 음악의 핵심적인 유형을 고려할 때 별반 중요하지 않은 자그마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역주: 독일 시인이자 동방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1788 – 1866)는 여섯 자녀 중 두 명을 잃은 직후 자녀의 죽음에 관한 428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편찬했다. 말러는 뤼케르트의 시들 가운데 다섯 편을 골라 곡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다. 원래 말러에게는 열한 명의 남매가 있었는데, 그중 여섯 명이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이 작품들을 통해서 “죽음은 강력하지만,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의 아내, 알마 말러는 1904년, 행복한 두 아이를 거느린 남편이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를 작곡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밝고 건강한 아이들을 껴안고 입맞춤했던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의 죽음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역주: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가곡집 「대지의 노래」의 가사는 당나라 시대의 중국 시를 독일어로 각색한 것으로, 19세기에 프랑스어로, 20세기 초에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번역으로 인해 원문은 서양적 요소의 첨가뿐 아니라 오해와 생략 등으로 인해 상당히 변형되었다.) 의 마지막 가창,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교향곡 그리고 여덟 번째 교향곡에서 『파우스트』 결말부의 가장 진지한 서곡을 생각해 보라.
마지막 곡의 경우 우리는 높은 산에 계단 형태의 고적한 건물을 짓고 은둔해서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도저히 망각할 수 없다. 말러의 음악적 재능은 세인들의 엄청난 오해로 인해서 마치 자동차의 구부러진 바퀴 축처럼 참담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러만큼 엄청난 갈망과 성스러운 마음으로 천국의 찬가를 작곡하려고 한 예술가는 없었다. 그래, 말러는 가득한 영혼의 도취감을 느끼면서 천국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음악가였다. 천국 내부의 원초적인 빛, 그 영원한 존재 앞에서 말러의 심장은 아마도 격렬하게 끓어올랐음에 틀림없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 예술가는 공허하고 맥 빠진 회의주의의 시대에 출현하여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향하는 사절 한 사람이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고상한 품격의 지조를 견지하면서, 예술의 격정적인 에너지와 남성적 열기를 쏟아부어서, 삶과 죽음의 세계에 관한 음악의 마지막 비밀을 선사해 주었다.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알마 말러-베르펠을 빠뜨릴 수 없다. 오스트리아 작가, 토어베르크는 그미를 한마디로 "시궁창"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내용상으로 잘못된 지적이다. 오히려 그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간 적극적 여성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미는 처녀 시절에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불타는 사랑의 감정에 빠졌다. 20대에 40대의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이 된 알마는 다시 이혼하여, 간축가 그리피우스와 결혼했다. 나중에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불타는 염문에 사로잡혔다. 그미를 떠나 군대에 끌려가야 했던 코코슈카는 장총을 발사하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코코슈타의 불멸의 작품들은 그미가 없었더라면,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미는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다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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