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음악 예술

블로흐: (1)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필자 (匹子) 2026. 5. 14. 09:57

출전: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die zweite Fassung, Frankfurt a. M. 1985. S. 108 - 114. (박설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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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차르트의 참된 모습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의 음악은 아즉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보리수 나뭇잎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라. 잎사귀는 우아하게 흔들리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 「탄호이저Tannhäuser」, 혹은 「로엔그린 Lohengrin」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뉘른베르크 명가수 Der Nürnberger Meistersänger」의 놀라운 무대 설정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역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843)은 바그너의 오페라로서 바라를 떠도는 유령 선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선장은 노르웨이 처녀 젠다를 만나, 그미의 희생으로 저주를 풀게 된다. 「탄호이저」 (1845)는 사랑과 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 오페라이다. 로엔그린은 가요 경연에서 비너스의 사랑을 노래하는데, 나중에 엘리자베트라는 처녀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로엔그린」 (1850은 신뢰와 약속을 다룬 바그너의 오페라이다. 주인공 로엔그린은 브라반트 공국에서 엘자를 도와 결혼하지만, “이름과 출신을 비밀로 해야 한다”라는 약속을 어긴다. 이로써 그는 엘자와 이별해야 한다, 「뉘른베르크 명가수」 (1869)는 바그너가 남긴 유머러스한 오페라이다. 기사 발터는 노래 경연에 참가하여 아름다운 처녀, 에바와 결혼하려고 하지만, 탈락 위기에 놓인디. 이때 구두의 장인 한스 작스가 그를 도와준다.)  이 작품들은 행위 오페라로서 여러 이행과정을 거치는데도 그 과정에 있어서 베토벤의 「피델리오 Fidelio」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내용은 아니다. 반지는 이교도의 춤에 굴복하고, 공허하고도 흐릿하게 비치는 동물적 욕구를 추동하는 물품이 아닌가?

 

여기서는 오히려 모차르트의 동화 오페라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파르지팔」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역주: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는 켈트 전설을 소재로 한 사랑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바그너의 오페라이다.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과 죽음이 등장인물이 겪는 비극적 삶이다. 「파르지팔」 (1882)은 성배를 찾는 영웅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 마법에서 벗어나서 성배 기사단을 이끌게 된다.) 두 작품에는 보리수의 상승 작용 그리고 결코 운명에 휘말릴 수 없는 인간의 유연한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오페라의 여러 주인공은 주어진 세상에서 더 큰 자아를 획득하고, 구원을 받으면서,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어떤 구원을 통해서 숙명이라는 질곡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메타 드라마 속에는 구원이라는 서정성이 반영되는 셈이다. 이것은 고향의 신화적이고도 음악적인 공간 속에서 초월적 오페라의 고유한 대상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제 우리 함께 조용히 우리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해 보도록 하자.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유동하면서 바깥으로 나오려고 애를 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소란스러운 낮에서 빠져나온다. 그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말과 행동이 더 이상 속도를 내지 않는 공간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의향은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꿈이다. 우리는 삶에서 동행하고 싶다. 때로는 반음계로 우울해지고, 동경 속에서 유동하며, 꿈으로 향해서 헤엄쳐 나간다. 꿈은 지난밤에 뚜렷한 상으로 떠오른 무엇이다. 이러한 느낌이 시간 개념 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서막의 내용이다. 서막은 아무런 사건 없는 동경의 모티프에 의해서 추상적으로 직조된 것이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공중에 둥둥 부유하는 느낌을 남긴다. 그렇지만 음악은 조만간 지상으로 떨어져서 구체적 사건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무대는 환하게 밝지만, 모든 배경은 다시금 아주 먼 공간의 아련한 상으로 머물고 있다.

 

 

제1막에서 두 남녀는 어두운 밤의 시간으로 향한다. 여기서 끔찍하고 냉소적인 분위기는 의식적으로 드러난다. 죽음의 음료수가 전혀 영문도 모르는 사람에게 엉뚱하게 전달된다. 그렇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이러한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지나친다. 낮은 불확실한 빛을 드리우지만, 밤은 은폐된 비밀을 묘하게 비추어준다. 사랑의 배반이 출현하는 곳에서 이졸데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싹트지만, 트리스탄은 예식을 차리면서 경직되어 있다. 두 사람의 몸짓은 기이할 정도로 유연하고, 서툴며, 왜곡되어 있다. 사랑의 묘약은 두 사람이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뜨거운 연정을 되돌려준다. 두 사람의 운명적 사랑은 시간 속에서 어떤 비약의 상징을 통해서 숙명으로 변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와 마찬가지로 운명에서 비켜 가지 않는다. 하겐은 영웅 지크프리트가 먼 곳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이복형 누이를 시켜서 지크프리트가 망각의 음료수를 마시게 한다.

 

여기서 먼 곳은 사건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며, 그 자체 재기억을 가리킨다. 만약 망각의 묘약을 마신다면, 지크프리트는 숲속의 작은 새, 브룬힐트의 돌 그리고 불의 마력이 작동되는 공간을 기억하지 못할 테고, 브륀힐데에 대한 사랑 또한 잊히리라고 했다. (역주: 「니벨룽겐의 반지」는 1200년에 처음으로 전해진 독일의 전설이다. 하겐은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크프리트를 제거해야 한다. 지크프리트는 망각의 묘약을 마시고 과거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하겐의 이복형인 군터는 브륀힐데와 혼인한다.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에 관한 전설을 4부작으로 완성하여 1876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하게 했다. 1. 라인의 황금, 2. 오딘의 여전사, 3. 지크프리트, 4. 신들의 황혼. 블로흐는 이 작품 가운데 「지크프리트」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하면 사랑의 묘약을 마신 두 남녀에게는 아무런 행동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묘약은 작품 내에서 어떠한 열쇠로, 어떠한 촉매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운명의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비극적 필연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초시간성 속에서 사랑의 산회 속에서 영원히 떠오르는, 다른 시간적 영역일 것이다.

 

두 남녀는 밤새도록 어디론가 걸어간다.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실제로 그들에게 이전되는 장소는 없다. 이는 첫 번째와 마지막 두 개의 장에서 분명히 인식된다. 음악은 두 사람의 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적 이동 그리고 마지막 사라짐을 멋지게 표현해 준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을 바그너는 청중에게 인지하게 조처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는 트리스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행동”이라고 말한 사실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해 준다. 그래, “트리스탄”은 그 자체 이름 없는 존재 내지는 엄청난 아다지오이다. 어떠한 외부적 대립도 트리스탄 속으로 잠입할 수 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 자체 하나의 갈등으로서, 하나의 파국으로서 의식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바그너가 말한 “행동”의 숨어 있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연극 예술에서 자주 엿보이는 중요한 움직임, 혹은 음악극에서 나타나는 일상의 대립을 표현하는 교향곡의 악장 등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감동적이며 외부적으로 명징한 결말을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조처는 어쩌면 무대 기법상으로 필연적인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트리스탄」 공연에 대한 한스 피츠너 Hans Pfitzner의 호평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역주: 한스 피츠너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소설가 초마스 만을 연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반-모더니스르”라고 규정하면서 미래주의, 무조음악 그리고 급진적인 실험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반유대주의를 천명했으나, 나치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피츠너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열광하였고, “반음계 Chromatik”를 옹호하였으며, 독일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카를 오르프 Carl Orff 그리고 오토 클렘퍼러 Otto Klemperer가 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서야 관객은 이러한 반응에 오히려 신경질적 거부감을 표명하였다. 사람들은 교향곡을 가미하면, 확실하게 더 좋은 반응을 거둘 수 있지만, 지금 방식으로 작품을 재공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특히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청중은 마지막 장면에서 예술적 매혹이 가라앉고 순수한 영혼의 길이 사라져서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특히 제3막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연주의 부분은 아무런 감흥을 안겨줄 수 없으며, 이보다는 차라리 제2막의 마지막 듀엣이 엄청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고 한다.

 

작품의 말미에는 찬란한 미래에 관한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고, 그저 교향곡의 전개만으로 반복되는 현재만을 다시 획득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약간의 찬사를 곁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오케스트라는 “사랑으로 인한 이졸데의 죽음”을 연주함으로써, 마지막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저세상에 이전될 수 있도록 도우려 하지만, 실제로 청중들을 어떤 견딜 수 없는 유약함 그리고 전혀 신비롭지 않은 달콤함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바그너의 「파르지팔」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페라의 마지막에는 해체된 삼화음이 거의 60배 이상으로 이어져서, 축제의 분위기는 그칠 줄 모르는데, 이러한 연주는 오히려 이전의 거창한 클라이맥스를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공연 전체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음악의 정신에서 비롯한 구원의 탄생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예술적으로 표현해 내기란 쉽지가 않다. 게다가 이를 연극의 장엄한 결말과 접목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사항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즉 제2막에서의 밤은 두 남녀로 하여금 사랑을 나누게 하는데, 이는 어둠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칠흑의 밤이 우리의 머리 위에 도래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무대 위에서 죽음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때 장례 행사 자체는 시신과 조문객들을 위안하고 오히려 축복을 안겨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밤의 세계에서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만남이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까? 바그너의 오페라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지크프리트가 사망하고, 남자들이 그의 시신을 암벽 높은 곳으로 옮기고 있을 때, 슬픈 음악이 울려 퍼져서 장례 행렬을 보조한다. 라인강에서 짙은 안개가 퍼져서, 무대의 장면은 흐릿하게 변하는데, 바로 이 순간에 어떤 막간극의 기이하고도 열정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막간극에 나타나는 이러한 환호성은 통상적인 진혼의 노래라든가 슬픔의 카테고리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안개가 다시 걷히고 살아남은 자들이 거주하는 지상의 삶이 드러나면, 진혼곡은 다시금 이전보다도 더 끔찍하고 암울하게 울려 퍼진다. 지크프리트의 시신이 머무는 지하 세계는 비록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로지 음악으로만 보존될 수 있는 역설로 묘사되고 있다. 안개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은 막간의 장면이 바뀌는 것을 자연스럽게 감추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그너는 거대한 음향이 터져 나오기 전에 우리의 귀 내지는 심장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안개에 가리도록 조처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그너의 독창적인 기법이 아닐 수 없다. 바그너는 등장인물들의 면모를 약화하고, 대신에 음악의 울림을 강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서 「지크프리트」는 「트리스탄」의 결말보다 더 좋은 반응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연 당시에 오케스트라의 음은 은은하고 미약하게 울려 퍼졌다. 바그너가 중시한 내용은 어디서나 도입되지는 않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인물들, 멜로트 Melot, 브랑게네 Brangäne, 쿠르베날 Kurwenal 그리고 마르케 Marke 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역주: “멜로트”는 트리스탄의 친구이자 기사인데, 친구를 배신하고 두 남녀의 사랑을 마르케 왕에게 이실직고한다. “브란게네”는 이졸데의 시녀이다. 그미는 사약과 사랑의 묘약을 바꿔치기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 사랑하도록 조처한다. “쿠르베날”은 트리스탄의 시종인데, 끝까지 주인공에게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 “마르케”는 콘월 지역의 왕이자, 트리스탄의 숙부이다. 그는 나중에 이졸데와 결혼하지만, 트리스탄과의 관계를 접하고 슬픔과 배신의 감정으로 고통을 받는다.). 브랑게네는 어리석고 천박한 여자로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멜로트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자로서 눈앞의 이득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 쿠르베날과 마르케는 심성이 선한 안긴 유형이다. 그들은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소극적이고 겸허하게 처신한다. 특히 쿠르베날은 어느 목자의 비밀스러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밝히면, 주인인 트리스탄이 사악한 범인으로 몰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르쇠로 일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