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음악 예술

에른스트 블로흐: 베토벤 그리고 소나타의 정신

필자 (匹子) 2026. 4. 22. 11:43

다음의 글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에 실려 있다. 출전: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die zweite Fassung, Frankfurt a. M, 1985, S. 85 - 88. (국내 초역이다. 많은 참고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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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이르러 모든 잘못된 것이라든가 고리타분한 것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육중한 납은 부드러워지고, 왜곡된 상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베토벤은 그야말로 알려지지 않는 무엇을 끝까지 추적하였다. 무한의 존재여, 그대를 끝없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심장은 얼마나 찬란하게 박동할 것인가? 우리는 보다 찬란한 영광이 도래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예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갈망일 뿐,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음악이라는 대양이 거칠고도 폭풍의 격랑으로 무언가를 발설할 때, 우리의 영혼은 찬란한 별을 바라보면서 끓어오른다. 그래, 베토벤은 사악한 영혼 루시퍼의 아들이다. 그는 마치 최종점의 사실로 향해서 우리를 이끄는 악령의 음악가일지 모른다.

 

베토벤의 음악은 우리를 여기서 보다 개방적으로 심호흡하게 만든다. 노래는 만곡을 그리면서 거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뻗어나간다. 최소한 거대한 악장에서 주요 선율은 놀랍게도 축약되어 있다. 음이 서서히 멜로디로 드러나려고 할 때 하나의 변주는 거의 생략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길게 뻗어나가는 아다지오의 음이다. 아다지오의 음은 더 이상 괴로움을 표현하지도 않으며, 그냥 휴식을 취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마치 설득하는 듯이 청중을 감상적 분위기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 여기서 변주는 -파울 베커 Paul Bekker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음의 세밀한 분할 내지는 내적으로 모순 없는 전개를 가리킨다고 한다. (역주: 파울 베커 (1882 – 1937): 독일의 지휘자, 음악 평론가. 음악에 관한 많은 문헌을 발표하였다. 블로흐는 그의 책 『베토벤에서 말러까지의 교향곡 Die Sinfonie von Beethoven bis Mahler』 (1918)을 참고한 것 같다.)

 

말하자면 음은 여기서 노래와 멜로디 내지는 주요 선율이 세밀하게 분화된 감정 순서를 이어 나가는데, 비교적 수동적으로 조용히 전파된다. 서로 다른 많은 착상을 기본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멜로디는 주요 선율에 맞추어 론도 형식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음은 가급적 느슨하게 변조되는데, 하나의 엄격한 소나타 형식을 배격하고 있다. 이로써 음악은 거의 광시곡과 같은 음의 다양성으로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이때 다양하게 울려 퍼지는 음은 감정 그리고 주요 선율 사이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론도는 시적 변주의 요소뿐 아니라, 극적인 소나타의 요소 또한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연결은 특히 베토벤의 음악에서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엄격하게 스케르초에서 나타난다. 적어도 그것이 미뉴에트에서 수용되는 한 스케르초야말로 베토벤 고유의 음악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미뉴에트는 웃음과 경멸이 뒤섞인 어떤 비밀스러운 즐거움 속에서 그리고 노여움과 아이러니가 약간 뒤섞인 댄스 리듬을 통해서 연주된 바 있지 않는가? (역주: 미뉴에트는 3/4박자(또는 6/8)로 연주되는 우아한 리듬의 춤곡에서 발전한 음악 형식이며, 3악장 교향곡의 3악장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사항에 해당하는 거대한 범위에서 사용되는 소나타 악장에 관해서 거론할 필요가 있다. 열정, 고통, 환희 그리고 해결 등은 베토벤 음악에 결집해 있는 감정의 구성성분으로서, 고유한 형식으로서의 베토벤 소나타의 특징을 말해준다. 알레그로, 아다지오, 스케르초 그리고 피날레 등과 같은 용어들은 -때로는 부분적으로 상당한 의미 변화를 드러내지만- 그러한 감정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첫 번째 악장은 대체로 알레그로와는 완전히 다르고, 마지막 악장은 –때로는 약간 변조되기도 하지만- 주로 론도 형식을 도입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주는 통상적으로 어떤 대립을 느끼게 하는 엄격한 구성과는 대립하고 있다. 말하자면 피날레는 자발적이고 느슨한 해결 방안으로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제1악장과 더불어 소나타 음악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설정된다.

 

물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예외적으로 고유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높은음의 영역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질서인, 어떤 둔탁한 오류의 걸음 그리고 어떤 해방된 가벼운 유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베토벤은 피아노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놀라운 움직임과 강력함을 직접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렇기에 베토벤 음악의 경우 오케스트라는 마지막에 이르러 피아노 없이는 결코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베토벤은 피아노를 순식간에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 음량을 감당하고 모든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탁월한 악기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특히 이후에 발표된 소나타의 기술을 담고 있는 피아노 악장은 그렇게 명징한 특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러 개별적인 소나타를 특히 “망치 소리를 내는 피아노”로 연주할 때 소나타 음악은 우리의 귀에는 마치 교향곡으로 감지될 정도이다. (역주: 베토벤은 자신의 29 번째 「피아노 소나타 (Opus 106)」 (1818)를 “망치 피아노 Hammerklavier의 곡”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사실 소나타와 교향곡은 매우 근친한 음악이다. 소나타와 교향곡에는 동시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어떤 조직적으로 구획된 행동이 공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가지 음악 장르를 “은폐된 오페라”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에는 어떤 극적인 구도의 원칙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사건을 위주로 하는 변화가 강조되면, 극적 내용에 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음악이 노래하는 주선율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예술적 전체성의 깊이로 이끌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베토벤은 모든 것을 주도하고 명령하며 압도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감정적 분출을 제어하고, 설득에 대한 열망이라든가 사건 형태를 면모를 어느 정도 차단하곤 한다.

 

이로써 베토벤의 경우 주요 선율은 생명력 넘치는 개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과는 거리감을 취한다. 예컨대 그의 교향곡에는 개별성의 억눌린 분노 그리고 전체성의 거대한 굳건함 사이의 간격 내지는 거리감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구원이 베토벤의 잘 알려진 첨예한 주요 선율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은 여기서 별반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언젠가 아우구스트 할름 August Halm이 풍요로운 D단조의 소나타에 관해 지적한 바 있듯이  (역주: 아우구스트 할름 (1869  1929): 독일의 음악 평론가. 특히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 푸가에서 자신이 묘사했던 "푸가 문화"와 "소나타 문화"를 융합하고자 했다. 바흐가 구현한 “푸가 문화”는 통일성의 문화, 즉 푸가의 모든 것이 관련되는 주제의 문화라고 한다. 이에 비해 베토벤의 소나타는 이와는 대조적인 형식으로, 형식의 진행, 즉 음악의 다양한 "단계"를 거치는 형식적 과정이 우선시된다고 한다. 할름은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서 두 "문화"의 종합을 보았다.), 어떤 이중적 타격이 고음을, 어떤 주도하는 음이 알레그로의 주선율을 그리고 어떤 화음이 아주 느린 라르고의 주선율을 형성하는데, 이는 빈번하게 오로지 삼화음, G 화음 그리고 토니카 화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주요 선율은 아주 첨예하게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아주 정밀하게 주요 선율을 인지하게 하는 리듬과 함께 자리한다. 주요 선율은 오랜 이행 과정이라는 혼란스러운 우회로를 거쳐서, 현재의 순간 갑자기 이전에 기준이 되었던 기본음의 면모를 다시 견지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자욱한 안개가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두운 탄광 지역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사람들은 갱로(坑路)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무언가를 캐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주요 선율의 상(像)과 대비되는 음으로서, 맨 처음에 마치 먼 속에서 비치는 아크 램프처럼 비치다가, 갑자기 외부 세상의 밝은 상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주요 선율은 무언가를 동경하다가, 그것을 안타깝게 놓친 다음에 첫 번째 주요 선율을 통해서 다시 획득한 토니카 화음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주요 선율과는 다른 무엇에서 싹이 튼다. 그것은 크든 작든 흥분의 끓어오름과 가라앉음이며, 흔들림과 망설임, 느슨함과 소멸, 온갖 종류의 의혹과 상승 작용으로서 그 자체 모든 새로운 역동적 표현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의향은 가령 거칠게 격노하고, 아무런 대가 없이 헌신하며, 무언가를 시도하는 무엇인데, 노래의 효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이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빛의 변화 그리고 세계의 소란스러움 등은 빛의 명암과 강약의 변화로 표현되고 있다. 음악은 조화롭고 리듬 감각의 사고에서, 정확히 설정되고 잘 준비된, 적시에 자리하는 화음에서, 화음의 끝맺음에서 나타나는 의식된 에너지에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서 다시 도달하게 된 현재의 기본음에서, 권력의 문제가 리듬 감각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조직체에서 파생한다. 두 개의 주요 선율은 그 자체 추상적이나, 청중들을 묘하게 긴장시킨다. 그것들은 두 가지 대립 원칙의 서로 다른 역동적 면모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베토벤의 음악은 찬란한 삶의 이행이라는 보물뿐 아니라, 어떤 새로운, 수많은 것들과 관련되는 시간 순서를 들려준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 동시적으로 재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은 이어지는 흐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속에서 동시적으로 재현되는 양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 측면에서 수직으로 축조된 복합체로서의 수평성이며, 나아가 어떤 각인된, 극적 형태를 형성하는 대위법을 통해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토벤 음악의 가치를 어떠한 다른 곳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베토벤의 음악에서 스스로 생동하고 무언가를 생산하며, 외부로 출현하는 세계의 내면을 고찰할 수 있다. 자아는 자그마한 텐트를 박차고 나오며, 영웅은 총체적으로 확장하는 자신의 존재가 지닌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한다. 그의 목소리는 캄캄한 밤에 도움의 외침이 되고, 노여움의 외침으로 퍼져나간다. 주위는 너무나 어두워서, 강물에 빠져 죽은 영혼은 더 이상 찬란한 빛을 예리하게 주시할 수가 없다. 먼 곳의 별들 그리고 하늘 위의 천사들 역시 칠흑의 어두움 속에서 망각의 늪에 갇혀 있을 뿐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크게 그리고 거침없이 포효하는 소리이며, 세상의 모든 포괄적 문제를 예술적으로 끌어올린 무엇이다. 그 당사자는 바로 음악의 정령이며, 세상의 어디서도 미리 형성되지 않았으며, 수용된 바 없는 존재다. 그의 음악은 모든 열정과 판타지의 스케일을 넘어서, 마지막에 이르면 거사를 도모하는 동지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환영 속에 떠오르는 성부에 대한 동경을 추구한다.

 

베토벤 음악 속의 열정은 단순히 내면의 삶이라든가 내면성의 폐쇄적 정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폭과 깊이에 있어서 개인과 자아를 어떤 진정한 의미의 우주적 형체로 변화시킬 정도로 높고도 심원하다. 자아의 우주적 열정은 어떠한 장애물과도 부딪치지 않은 채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을 하늘 위로 떠오르게 하거나 가라앉히며, 인간성의 모든 범위와 영역이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조처한다. 베토벤 음악의 가장 찬란한 부분은 지상에 자리하는 신비로운 대양의 물결과도 같다. 심원한 음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되어 항성의 해안가를 철썩거리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내향성에서 태동한 거대한 로마제국이며, 역사적 사건, 마력과 같은 기적 그리고 역사철학을 찾게 하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소재를 하나의 자양으로 삼아서 자라난 음악가가 바로 브루크너와 바그너가 아닌가? 이 점에 있어서 베토벤은 음악적 예언자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베토벤은 음악의 모든 면을 충족시킨 자가 아니라, 다만 음악 예술의 윤곽을 그려놓은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리 공연 음악인 탄호이저 서곡을 다시 듣고 있다면, 우리의 귀는 지하에서 부글부글 작열하는 안개의 제국을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역주: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1848년에 초연되었다. 이 작품이 1861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을 때 서곡이 끝난 다음에 발레가 이어졌다. 이때 음악은 화려한 관능미를 부추기게 된다. 이로 인해서 귀족들은 인상일 찌푸렸다고 한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게임 이론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탄호이저의 딜레마"는 합리적 의사결정의 문제로 부각된다. 이에 따르면 주인공은 가수 경연 대회에서 딜레마에 직면한다. 만약 그가 경연에서 지면 사랑하는 엘리자베트를 잃게 되지만, 만약 그가 우승하여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게 되면 속죄할 기회를 잃게 되어 자신의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게 자기 파괴적으로 귀결되는데,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비너스에 대한 충성 고백은 어쩌면 효용 극대화를 위한 최선의 해결책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그 위에서는 순례자의 합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돌기둥과 함께 승리를 구가하는 교회의 사원이 축조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할지 모른다. 즉 베토벤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전략적 시각을 지닌, 어떤 죽어가는 모세일 수 있다고 말이다. 그에 비하면 바그너의 음악은 먼 곳의 축복받은 땅이 손짓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극적인 대위법을 담고 있는데도- 어떤 시적인 멜리스마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항을 간과할 수 있지만, 베토벤 음악의 진면목을 간과할 수는 없다. 마치 우리가 헤겔 위에 칸트를 세울 수 없듯이, 베토벤 위에 바그너를 설정할 수는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간 존재 속에서 꿈틀거리는 선험적 비밀은 성급하게 충족시킨 모든 객관주의 유형보다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자아는 베토벤의 경우 어떤 확고한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길은 어쩌면 마지막 신이 지나친 바 있는 멀고도 험한 여정이 아닌가? 베토벤의 교향곡 – 그 속에는 원초적 감정을 깊이 파고들려고 하는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다. 거대한 우주 인간 그리고 대양은 무언가를 투영하려고 자신의 분산시키며 무언가를 발설하고 있다. 어떤 인간다운 인간 존재에 관한 꿈은 영원히 머뭇거리는 하늘에 거의 절망적으로 대항하면서, 어떤 영웅적이고 신비로운 무신론이라는 가장 강력한 광채의 상을 퍼뜨리고 있다. 전체로서의 “우리”는 바로 여기 음악의 정신 속에서 아우르고 있다. 마치 위대한 그리스도가 수많은 조각 작품에서 표현되듯이, 진정하게 확장되는 교향곡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의 군상(群像)은 “우리”로 찬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곳에서는 동지애로 나누어진 세계의 토대가 찬란한 음을 메아리로 되돌려주고 있는데, 이러한 음악적 사건 현장은 개개인의 “다중 우주론 Multiversum”으로 정의될 수 있다.

 

상기한 모든 사항은 베토벤의 음악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베토벤은 가장 훌륭하게 역동적인 악령, 루시퍼의 정신을 선택하고 있다. 비록 약간의 거리감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기독교 정신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미일관 어떤 긴장된, 영웅적인, 종합적인 측면에서 정신적 영혼의 환영을 보여준다. 이미 언급했듯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희망을 시적으로 획득한, 자아의 마음가짐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다성 음악으로 표현된 완성의 말씀이며, 사건 형태의 저편을 위한 영원한 수정 사항으로 이해된다. 그에 비하면 베토벤은 마지막 사건의 잔여물 그리고 마력을 음악으로 표출하면서, 이른바 막강한 힘을 지닌, 신앙의 세 단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 깨달음으로서의 찬란한 빛 그리고 묵시록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완전함을 쟁취한 자가가 걸어갈 수 있는 세 단계이다. 베토벤은 여기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예수가 아니라, 루시퍼라는 악령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 루시퍼는 성령 Paraklet의 싹이며, 우리 앞서서 투쟁하는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성스러운 영혼인 성령은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존재가 수호신으로 모시는 권력자, 그 대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