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해하는 존재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 구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고, 나부터 하루 세 번 자신의 행동에 하자가 없었는지 반성해 나가야 한다. 나 자신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다만 우리가 이를 의식적으로 떠올리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2. 1980년대 말에 독일 구머스바흐에 있는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모임에서 이란의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압둘라 아르반자니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참으로 고결하고 호방한 인품을 지닌 이란 청년이었다. 그의 여친, 이르마도 품격 넘치고, 섬세하며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들은 혹시 테헤란에서 변을 당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그의 성격을 고려할 때,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압둘라는 횔덜린의 히페리온에 등장하는 혁명가 알라반다를 연상시킨다. "Alabanda, ein bruederliches Wesen!"
3. 2025년에서 2026년 사이에 이란에서 민주화 데모로 사망한 자들의 수는 삼천에서 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불과 3년 전에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500 명 이상 사망했고, 1970년대 말에 블랙 프라이데이에 사망한 이란 사람들의 수는 공식 통계에 의하면 2000 명을 상회한다.
4. 자고로 한 명의 인간은 하나의 고결한 우주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사망자의 수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죽임은 숫자로 계량화할 수 없는 비극이 아닌가? 전두환의 데모 진압 내지는 발포 명령으로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200 명 이상이다. 이에 비하면 이란에서 사망한 젊은이들의 수는 열 배 이상이다. 얼마나 많은 비극과 이로 인한 피 터지는 생존자의 절규는 피 묻은 열사(熱沙)의 땅에 퍼저 나가고 있을까?
5. 혹자는 다음과 같이 항변할지 모른다. 지금이 남의 걱정 할 때인가? 라고. 북한에서 죄없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의 수도 부지기수라고. 그래, 필자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문 기사를 톺아보라, 얼마나 많은 죽음과 죽임이 세상에 자리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의 죽음 그 배후에는 깊은 절망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빙산 일각으로 숨어 있다. 그들이 누구든 간에 우리는 억울한 탄압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6. 칼은 주어진 현실에서 펜보다 강하다. 그러나 펜은 칼보다 강해져야 한다. 세계의 지식인들이 무기력하게 TV만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이란의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란의 혁명 수비대를 고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국제적 단체를 결성하여 이란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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