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a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박설호: (1) 메르시에의 시간 유토피아 "서기 2440년"

필자 (匹子) 2026. 4. 9. 10:09

1. 시간 유토피아의 대표적 작품: 메르시에의 『서기 2440년』은 미래의 시점을 소설의 내용으로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획기적 선을 긋는 작품입니다. 이로써 르네상스로부터 이어온 장소 유토피아의 패러다임은 시간 유토피아로 의미 변환을 이루게 됩니다. (Trousson: 21). 작가는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장소 유토피아에서 활용된) 여행자의 서술 방식 대신에, 미래에 관한 꿈의 체험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익명의 주인공은 1768년 친구와 토론한 뒤에 잠이 들었는데, 2440년에 노인의 몰골로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672년 동안 깊은 잠을 잔 다음에 미래의 파리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중시되는 것은 꿈의 기능입니다. 꿈은 비록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성의 영향 속에서 작용하는 모티프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사유를 뛰어넘게 되는 수단이 됩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명제는 오로지 자아의 깨어있는 의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2. 소설 『서기 2440년』의 영향: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서기 2440년』은 출간 금지조처를 당했습니다. 이 작품은 국가의 권위 및 가톨릭의 교리를 비아냥거린다는 게 하나의 논거였습니다. 1778년에 에스파냐의 어느 종교 재판관은 『서기 2440년』이 무신론적이고, 신을 모독하는 끔찍한 작품이라고 논평하였습니다. 같은 해 에스파냐의 왕은 메르시에의 작품을 금서로 규정하면서, 국가 전역에 팔린 판본을 수거하여 불태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만약 메르시에의 작품의 판매가 적발될 경우, 당국은 당사자를 벌금형과 함께 6년 징역형을 내리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실제로 『서기 2440년』은 절대 국가의 봉건 권력, 귀족과 고위수사들의 부패 그리고 가렴주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금서 조처에도 불구하고 『서기 2440년』은 나중에 놀라운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의 특권층만이 이 작품을 접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시대에는 일반 사람들 또한 메르시에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탐독하였습니다. 작품은 1771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유럽 전역에서 여러 언어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토피아 연구가들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을 국가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예외 작품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국가 소설의 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을 집약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Freyer: 123). 작품은 19세기에 이미 실현된 사항을 예리하게 선취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미래 사회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Kleinwächter: 16f).

 

3. 다작의 작가, 메르시에: 메르시에는 1789년 이후로 언제나 혼자 살았고, 혁명 이후에서 언제나 진보적 자세를 취하면서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가난과 대중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십 년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문헌은 엄청난 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기 내지는 문학 철학 역사학의 내용을 담은 장편 소설 74편, 26권의 시집, 51편의 극작품, 3권의 사상 서적, 12권의 번역서들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남긴 미발표 유작의 원고는 도합 만 페이지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평가는 냉담한 것이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문헌을 혹평하고, 메르시에를 악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메르시에의 거침없는 묘사, 독창적 표현과 완강한 어조 등은 지속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기득권은 온건한 문학계에 온갖 풍파를 일으키는 난잡한 기사로 그를 단죄하였습니다. 가령 “루소를 모방하는 원숭이”, “혼란스러운 인간”, “빈민굴의 루소”, “디드로를 빼박은 인물” 등이 그에게 붙어 있던 닉네임이었습니다.

 

4. 메르시에의 삶 (1): 메르시에는 1740년 6월 6일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루이 15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선왕은 루이 14세로서 “짐은 국가다.”라고 외치며, 절대 왕정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바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메르시에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인문학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루소의 문헌들이었습니다. 그가 이른 시기에 문학적 재능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에 쌓은 인문학적 소양 때문이었습니다. 1763년에 메르시에는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마들렌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가 담당한 과목은 주로 변론술이었습니다.

 

1765년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작가로서 집필활동에 몰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닌 채 엄청난 작품을 집필합니다. 1781년에 메르시에는 12권의 분량의 놀라운 르포 소설 『파리의 정경Tableau Paris』의 집필을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왕정체제를 열광적으로 비판하는 문헌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검열로 인하여 더 이상의 작품의 발표가 어렵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탄압이 거셀 무렵,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프랑스 남부지역인 뇌샤텔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5. 메르시에의 삶 (2): 1771년에 『서기 2440년』에 발표한 다음에 메르시에는 프랑스 계몽주의자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분파에 속한다는 평판을 듣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그는 정기 간행물, 『18세기의 정치, 시민 문학 연감Annales politiques, civiles et littéraires du dix-huitième ciècle』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서기 2440년』은 프랑스 내의 거대한 혁명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변화의 소용돌이는 그를 마냥 집필에 몰두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1792년 10월에 메르시에는 “국민의회Convention nationale”의 의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지롱드 당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 메르시에는 지롱드 당원이었지만, 1792년에 뒤늦게 자코뱅당원이 됩니다. 그는 당리당략에 근거하는 극단적 처형의 정책에 수미일관 반대합니다. 이로 인하여 그 역시 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해 12월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다음에 메르시에는 다행히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아내에게 보낸 88통의 편지를 읽으면, 우리는 그가 1년 동안 처형에 대해 얼마나 끔찍한 두려움을 느꼈는지를 접할 수 있습니다. (주명철: 143).

 

6. 메르시에의 삶 (3): 이후의 왕정 시대에도 그는 공화주의의 지조를 고수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권력 찬탈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메르시에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1802년에 메르시에는 경찰국으로부터 소환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비난은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헤성 같이 등장한 작은 거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독자의 외면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집필밖에 없었습니다. 메르시에는 파리의 단칸방에서 혼자 살면서 집필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가난과 고독과 싸우기 위해서는 집필 외에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파리Le Nouveau Paris』(1799)라는 제목의 회고록은 자신이 겪었던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메르시에는 1814년 4월 25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는데, 당대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