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에른스트 블로흐: 음악이란 무엇인가?

필자 (匹子) 2026. 7. 18. 10:33

다음의 글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에 수록된 것이다.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die zweite Fassung, Frankfurt a. M. 1985, S. 199 -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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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예견하는 무엇으로서 찬란한 꽃을 피운다. 그것은 심지어는 가시적 세계 내지는 가시적 세계 속에 드러나는 신의 흔적마저도 모조리 파괴할 수 있다. 음악은 지금까지 나타난 바보다도 더 심층적인 토대를 고려할 때 가장 나중에 태동하는 예술이며, 가시적인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는 예술이다. 따라서 음악은 형태를 벗어나는 역사 철학, 내향성으로 향하는 윤리학과 형이상학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형태적 특성을 따라잡는 최후의 서양 예술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전면에 등장하는 행위는 외침 그리고 청취이다.

 

시간의 힘과 거대한 전략, 외침과 두드림, 고통침, 이름조차 없는 무엇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예감하고 청취해 보라. 바로 여기서 어떤 사물의 핵심,, 즉 소리로 이루어졌으나, 아직 존재하지도, 이름으로 명명되지 않은 핵심적인 무엇이 탄생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음악이라는 화덕에서 벌겋게 투쟁하며 탄생하는 그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예견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진지한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 영혼이 배제된다면, 예술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의 지성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음악은 한마디로 예감 그리고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라는 새로운 대상 이론을 통해서 비로소 실존하게 되고 하나의 혁신적인 개념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음악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꿈결같은 정서를 안겨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음악을 통한 꿈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여러 가지 본능적인 열정을 헤집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음악이 안겨주는 꿈은 성취되지 않은, 다시 말해서 현세에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합당한, 깨어 있는 갈망은 세련되게 가꾸어진 음을 통해서 뜨겁게 달아오른다. 음악의 놀라운 감흥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며, 심장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을 밝게 그리고 선하게 변화시킨다. 유일하게 생각되는 동경은 거기서 비밀스럽게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 에테아 호프만의 소설을 예로 들자. (역주: ETA. 호프만은 실러의 희곡, 「강도떼들 Die Räuber」을 패러디한 중편 소설 「강도떼들. 보헤미아의 어느 성에서 겪은 두 친구의 모험 Die Räuber. Abenteuer zweier Freunde auf dem Schlosse in Böhmen」을 사후 유고집에 남겼다. 호프만은 실러의 작품을 패러디함으로써 예술 사조인 “질풍과 노도 Sturm und Drang”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려고 했다. 1. 영웅주의의 해체: 자유의 이념은 실제 현실에서는 착각 그리고 자기기만으로 변질할 수 있다. 2. 선악의 이원론 비판: 사람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기 어려우며, 선악은 개별 인간의 마음속에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3. 낭만적 아이러니: 비극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도둑, 파울은 숲의 어느 곳으로 사라졌니?”하고 묻는다. “나는 뒤따르면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관목과 나무 사이의 구역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내 혈관 속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저 멀리 영주님의 사냥꾼들이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리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마침 나는 슈메를렌바흐의 시냇가에 있었는데, 말과 소와 양들이 모두 강둑에서 시냇물을 마시고 있었고, 그 사이로 사냥꾼들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화가 많으면 어떻고, 은화가 적으면 어떠랴! 파울을 때리지 않겠다. 나는 슈메를렌바흐의 시냇가에서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작품에서 사냥꾼의 나팔소리는 놀랍게도 등장인물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먼 곳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확신, 어디선가 “현세의 모든 향락의 범위를 넘어서는 고귀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 소망은 어떠한 정신도 엄하게 길들일 수 없는 겁많은 아이처럼 감히 입밖에 끄집어낼 수 없는 무엇“이라는 확신이 솟구치고 있다. (역주: ETA 호프만은 1810년 “일반 음악 신문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에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의 서평을 발표하였다. 블로흐는 이 가운데 한 구절을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다.)

 

음악이 지니고 있는 가장 진솔한 방향에 관해서 소설가 장 파울 Jean Paul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즉 ”사람들은 어째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망각할까? 즉 음악이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점 말이다. 음악이 어떠한 예술보다도 더 전능하고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아무런 중간 단계도 없이 기쁨과 슬픔 사이를 오고 가게 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미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고향으로 향하는 동경이며,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향수가 아닐까?“ (역주: 장 파울의 인용문은 그 자체 명언이다. 이것은 자신의 철학적 대화록 『젤리나, 혹은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Selina oder über die Unsterblichkeit der Seele』 (Cotta, 1827)에 실려 있다.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은 『음악의 작가 정원 Dichtergarten der Musik』에서 장 파울의 문장을 다시 인용하였는데, “음악의 향수”에 관한 명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슈만의 방대한 문헌은 오늘날 책이 아니라,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가, 200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78권으로 간행되었다.)

 

이처럼 음악은 저편 세계의 확실한 징표이고, 위안의 노래이며, 마법처럼 죽음으로 매혹하는 힘이고 동경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이다. 또한 음악은 마지막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굳세게 하는, 밤에 피는 믿음의 꽃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력하게 초월을 확신하게 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일방적으로 생각했던 레안드로스의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한 음악의 내면에서는 훨씬 더 확실하게 헤로의 등불이 타오른다. 찬란한 음악은 인간 영혼이 스스로를 비추며 드러내는 꿈의 하늘, 바로 그것이다. (역주: 헤로는 헬레스폰토스 연안의 아프로디테의 여사제였다. 그미는 맞은 편 도시 아비도스의 청년 레안드로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사제 신분이라 결혼할 수 없었다. 헤로는 등불을 피워 탑 꼭대기에 올려 두었고, 레안드로스는 헤엄을 쳐서 헤로를 찾아왔다. 어느 날 나쁜 날씨로 인하여 램프가 꺼졌을 때 그는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익사한다. 시체를 발견한 헤로는 그를 따라 자살하고 만다. 블로흐는 레안드로스의 열정과 헤로의 램프를 대비시켜, 전자를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로, 후자를 희망이 철학으로 압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