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die zweite Fassung, Frankfurt a. M. 1985, S. 146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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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Lukács는 『영혼과 형식 Die Seele und die Formen』 (1911)에서 어떤 오로지 형태적이고 객관주의적인 견해를 세밀하게 파고들면서, 신고전주의를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신고전주의의 시각은 예술 작품에 형식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어떤 발언 양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술 작품의 본원적 의미는 주어진 형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아이러니하고, 간접적인 에세이에서 드러나는 특징처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고유하게 획득한 심원함에서 발견될 수 있다. (역주: 루카치는 이 책에서 형식에 내재한 객관성을 강조했다. 이로써 축소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의지이다. 형식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의 예술론은 예술가 개인의 주관적 의지와 그 결과를 처음부터 은폐하고 있다. 이로써 주체의 내면, 감정 그리고 환상은 철저히 무시된다. 블로흐는 부분적으로 루카치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형이상학적 귀족주의자, 루카치는 형식을 통해서 세계의 비극을 완벽하게 표현했지만, 이를 넘어서는 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
루카치의 작업 방식은 개별적 사항에 있어서는 놀라운 결실을 안겨주지만, 전체적 사항, 즉 시스템의 방법론으로서 작품 탄생의 부호와 함의를 파고드는 문제에 있어서 오로지 형식만을 주로 분석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마치 암호와 같은 형식에 골몰하여 내적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로써 중시되는 것은 밝히기 어려운 무엇, 고유성에서 벗너난 무엇, 신시대 이후로 단순히 문체로 표현되는, 창작의 필연성과 관계되는 플로베르 식의 글쓰기 등에 대한 인위적 의미 부여이다.
루카치는 존재의 정황만을 따지고, 예술가의 역동적 행위의 능력이라든가 완전히 확정된 예술적 특징을 따지지 않는다. 냉정하고 기술적인 차원에서의 작업실의 분위기만 고려하게 되면, 예술가 자신의 의지, 예술적 대상이라든가 감정적인 과잉 등은 안타깝게도 논의에서 생략될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흉측한, 아름다운 그리고 의미심장한 등과 같은 감정은 어떤 천박한 예술 감상자가 느끼는, 짤막한 감흥의 표현이다. 녹색과 빨강의 대비, 유각(遊脚), 지각(支脚),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자세, 교차 관계, 나폴리 6화음 등은 그저 개별적 사항에 해당하는 간단한 사물, 어떤 공식을 가리키는 단어에 불과하다. (역주: “유각 Spielbein”은 체중을 싣지 않은 다리를, “지각 Standbein”은 체중을 실은 다리를 가리킨다. 한쪽 다리에 힘을 실은 포즈는 미술 이론에서 “콘트라포스트 Kontrapost”라고 일컬으며, “교차 관계 Querstände”는 음악 용어이다. 같은 음이 서로 다른 변화표를 가지고 충돌하는 현상으로서 F# -> F𝄮를 가리킨다. 나폴리 6화음은 다음과 같이 표기된다. “Db – F –Ab”). 이것들은 기껏해야 원칙적으로 종결되지 않은 예술 작품의 교육학적 “본질 규정 Horos”을 위한 전달에 사용될 뿐이다.
숲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숲이 아니라, 나무들이다. 나무들은 기껏해야 숲의 정신을 보조하는 구성체로서, 작품 영역의 예술적 성분과 일치되는 무엇이다. 우리는 루카치처럼 개별적인 표현 방식에다 어떤 자의적 배경을 안겨주며, 이러한 표현 양식이 역사적 임무를 이행해나간다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루카치는 장편 소설, 대화, 혹은 다른 재능 넘치는 수단 등의 형식을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마치 역사 철학의 정신성이 회전하는 천구(天球) 위에 고착해 있으며, 가능한 발언의 형식에 의해서 그냥 왔다가 그냥 사라진다고 서술한다. 예술적 주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무엇의 역사는 다른 각도에서, 중세의 사실주의적 역사로 해명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우 혼란스럽게 작용하는 소재로서의 색채, 돌 그리고 언어 등이 아니라, 오로지 형식, 세심한 정밀성의 고려, 작용 의지와 중개 의지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들은 예술가의 관점에서는 유일하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구성 성분의 영역에 대한 전망에 해당하는 사항일 뿐이다. 그런데 예술가가 오로지 순수히 작품을 창작하는 존재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체험인데, 이는 특수한 유형의 예술 작품의 기술적 형식과 불가분의 동맹 속에서 외부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예술가는 비전, 형식 그리고 획득된 사물의 물질성 사이의 이미 완결된 조화로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집을 찾는다. 자고로 예술적인 무엇은 바로 지금 여기로부터 다시금 어떤 전이된 예언적인 재능으로 솟아오른다. 물론 발설되지 않는 것은 그대로 존속되는 법이 없다. 그렇지만 표현 수단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며, 그 내용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술가가 간접적으로 발설한 무엇을 세심하게 경청해야 하며, 더 이상 작품에 집착하면서 엄격한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 이제 새로운 예술가들은 자아에 충실하고 우리에 충실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우리 주위에 깔려 있는 안개를 접하고, 찬란한 무지개와 오색 영롱한 구름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우리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예술 작품 내지는 예술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간파할 수 없는 무엇은 때로는 기이하게도 어떤 심원함 속에 도사리는지 모른다. 언젠가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 Jean Pau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훌륭한 작가는 자신의 속옷 차림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가대의 옷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작가의 본모습을 바라본다고 착각하지만 말이다.” (역주: 역자는 이 구절의 출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두 가지 사항이 가능하다. 첫째로 장 파울은 자신의 『미학 입문』 에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개진한 바 있다. Jean Paul: Vorschule der Ästhetik, 1813. 둘째로 이 글은 장 파울의 유고, 대화록, 혹은 서한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예술가의 예술적 수단은 얼마든지 선동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술가가 빛에 비치는 형상을 바라보고 임의적 방식으로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미리 설정된 형식에 내용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엘포레 Elpore는 엘포레로 머물 뿐이며, 아무리 꿈꾸는 에피메테우스가 가까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인식될 뿐이다. (역주: 이는 괴테의 미완성 연극작품 「판도라」에 묘사되고 있다. 블로흐는 예술가가 본질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무엇을 “엘포레”로 설명하고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진흙으로 매혹적인 여인 판도라(모든 선물을 가진 자)를 빚었다. 에피메테우스는 형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친 죄로 인하여 판도라와 결혼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판도라의 상자에는 온갖 재앙과 함께 희망도 들어 있었다. 판도라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판도라가 그들의 딸 엘포레 έλπωρή까지 데려갔기 때문이다.) 예술적으로 중요한 무엇은 서서히 자신의 명료함을 드러낸다. 예술에 합당한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은 어떤 다른 자아, 어떤 다른 대상이지, 예술적 내재성으로 포착되는 형식과 같은 저편의 존재는 아니다. 만약 근본적 의지가 상승하게 되면, 그 대상으로 형태화된 무엇이 양적으로 많아지고, 안온한 음향은 더 많은 진정한 상을 소환해낸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육체성을 쌓아나가는 관찰된 본질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현의 형식, 작품의 외적 현실이 “탈-자연화”되어 있거나, 높은 수준의 추상성으로 출현한다면, 이는 시간상으로 나중에 드러나는 인상이며, 주로 표현 대상의 자연스러운 출현과 관련되는 추상적 특징일 뿐이다. 새로운 표현주의의 존재 형성 자체는 그런 식으로 “자연주의적인” 특징을 지니고, 단순히 사물에 대한 서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점성술에 의해 완성되고 완결된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그림도 존재한다. 가령 이집트의 신 호루스 Horus의 비석, 바빌로니아 마르두크 신의 부조상, 혹은 아시리아의 날짐승이라든가, 예언자 에제키엘의 부조 상을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작업에 있어서의 직접적이고 어떤 새로운 절대적인 존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일견 독자적으로 떠오르는 형식의 건축적 구성, 좋은 문장 등을 가리키는 무엇이다.
가령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는 자신의 문학 이론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낮은 층위의 “하위 대상”을 우선권을 지닌 “관찰 대상”과 균형을 맞우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주: 플로베르는 고귀한 소재와 비천한 소재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기 때문에, 이것들을 균형 있게 축조하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영웅, 신화, 비극이 높은 수준의 소재, 즉 “관찰 대상”이라면, 일상의 삶, 소시민의 일과 등은 낮은 수준의 소재, 즉 “하위 대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높고 낮음의 대비가 아니라, 미의 처리 방식이다, 관찰 대상은 같은 거리감 속에서 구조화되어야 하고, 하위 대상은 미적으로 고양된 문체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로베르가 말하는 “수준의 균형 équilibre des niveaux”이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플로베르에 의하면 문학적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거리감을 유지한 채 관할해야 한다.)
그런데 특정 양식이 우세했던 시대에는 작품은 그 속의 발언 내용처럼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고, 점성술의 시대에는 완전히 묘사된 형태의 부호가 어떤 완성되지 않은 표현적 서사적 봉인의 부호를 가로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개인적 자기표현의 작업이 주어진 곳에서는 의지, 주체 그리고 그 내용이 어김없이 존재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오로지 수단, 공식 그리고 무가치하고 배경 없는 무엇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 수단 그리고 형체에 합당한 하위 대상을 넘어서는 고유한 무엇이었으며, 어떤 암시하는 봉인, 혹은 스스로를 은폐하는 예술적 효력의 비밀이자, 그 자체 “상형의 표현 Idiogramm”이었다. 다만 우리는 어떤 방식에 있어서 대상과 관련하여 형태를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공식적이고 구성적이며 스스로 객관화되는 무엇이 어떤 중개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 어떤 대상의 부분으로 자리하는 영역일 경우 그러하다. 예컨대 우리는 공연 무대의 놀라운 작용, 리듬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유형의 대위법” 그리고 예술의 모든 시간적 문제와 이를 요청하는 공간의 문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한 유형의 대위법이란 예술가가 자신의 구체적 존재로서의 카테고리에 상응하는, 예술적 형체를 만들어내도록 작용하는 무엇이다. 여기서 어떤 예술적 형체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스스로 아주 깊은, 응결된 상태로서의 어떤 “형식” 속으로 파고든 셈이다. 이 경우 형식은 하부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식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 고찰한 대상의 순서 속에서 마치 어떤 “뼈와 같은 부분”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뼈와 같은 부분이란 고유의 삶, 내용 그리고 미적인 성분 영역의 어떤 심원한 의미로부터, 자아 그리고 진실로 향하는 비약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종국에는 봉인된 에너지 그리고 표현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외부로 드러난 내향성, 삶과 인간의 변모 등과 같은) 상형적 표현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 시대의 특별한 에너지는 일견 느슨하게, 정확히 말하자면 더욱 무의식적으로 고삐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본래의 목적지에 해당하는 참된 집으로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순수회화적인 무엇이 마음대로 덧칠되거나, 순수 음악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야만적인 판단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전례없던 세부적인 관점을 동원하여 이른바 “퇴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는 석고상을 만들어 비본질적인 것을 장식의 보고(宝庫)라고 잘못 판단하던 시기에 나타난 잘못된 논평이다. 그밖에 어러저러한 고대의 건축물이 “양식에 있어서 순수한” 면을 지니지 못했다는 말도 잘못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급격한 질풍과 노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직접적인 사항을 예술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 아주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은 에너지 과잉에 대한 기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상에 대한 엄격한 책임감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직업성은 지금까지 놀라운 양식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이 말년에 조용히 무언가를 예건하면서 작품을 창조한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즉 주관적이고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며, 본질을 냉정하게 서술하려는 태도 말이다.
“작품” 역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신속하게 스쳐 지나간다. 예술을 감상하는 눈(眼)은 강력하게 변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구원의 위안이라든가, 어떤 우회로의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품은 가령 다른 세상에 관한 과잉된 초월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평면에 모든 것을 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해야만 과잉된 신앙의 자극이 엄습하지 않거나, 어설픈 작품을 통해서 “형식”이라는 고전주의적 유산을 내세우면서, 마치 올림픽 경쟁과 같은 교육을 실행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역주: 이러한 발언은 루카치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다. 형식을 강조하게 되면, 우리는 예술에 담긴 우연성, 파편성, 모순 그리고 미완결성이 마치 결함 내지는 하자로 낙인 찍힐 수 있다. 루카치는 전위 예술의 기법 (파편적 서사, 의식의 흐름, 형식의 해체 등)을 하나의 퇴행으로 취급했다. 이에 대해 블로흐는 예술의 감각적 충격, 정서적 울림, 분위기, 음향과 색채 등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에 의해 작동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루카치가 중시하는 “형식”은 블로흐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갈망, 유토피아의 역동성, 변화의 과정을 담을 수 없는 불충분한 개념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술가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라는 점을 새롭게, 아무런 중개 없이 하나의 근원의 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경향은 처음부터 순수한 “내용 미학”에서 선험적으로 하나의 딜레탕티즘에 근거한 것이지만, 당사자는 아마추어라는 야유와 비난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만약 “형식”에 위배된 작품이 그 수준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초라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사항을 서툴게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어떤 놀라운 형이상학적 수준을 표현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과연 예술적 향유를 저버리고, 작품의 고유한 발언을 획득하며, 모든 당연한 간접성에 대항하는 도덕적 유명론이 바람직한 예술적 경향일까?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자연주의”, 더 좋게 말하자면 “주체”를 표현하는 리얼리즘, 과거에는 어떠했으며, 이제는 달리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마치 안내 방송과 같은 개입은 어떠한 문제를 키우는가? 인식의 품위, 어떤 “미적인” 현실과 이 영역에서 유토피아적으로 가능한 이념 제안 등과 같은 특수한 인식은 이러한 토양에서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예술은 오늘날에 이르러 어떤 예언적 능력을 담보할 수 있는 무엇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술의 이러한 특징은 이전에 만개한 바 있는, 아름다움의 “보여줌” 그리고 미적인 작용을 수동적으로 촉구하는 기능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역주: 여기서 블로흐는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유유자적하게 그리고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애쓴 문학적 사조를 독일 고전주의에서 발견하고 있다. 루카치는 “고전주의는 건강하고, 낭만주의는 병적이다.”라는 괴테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바 있다. Eckermann: Gespräche mit Goethe in den letzten Jahren, Insel: München 1985, S. 299f.) 그래, 부적절한 시기로 향해 마스크를 쓰고 접근하는 것은 그야말로 금물이다. 신들의 석상(石像)은 완전히 어두운 지하실에서 서성거리며, 우리의 가시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영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비밀스러운 석상을 숭배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태고 시대와 고딕 중세 시대의 예술적 의지는 모든 음악 예술의 의지와는 일말의 공통성도 없다. 음악은 하나의 작용개념으로써 어떠한 실망도 안겨주지 않으면서, 세계를 아주 자그마한 본질 없는 양식의 부분으로 표현해내지 않는가?
음악 예술은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미적 “향유”라는 형식적 문제 하나만을 꼬집어 내세우지 않는다. 미적 향유는 그 자체 세상의 문제 가운데 가장 사소한 게 아닌가? 미학의 개념은 감성을 강조하는 느낌이 아니라, 인지, 현상학 그리고 적절한 충만을 뜻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거대하게 기록된 인간다움 그리고 순수히 개방적으로 보존된, 그러나 신비적으로 남아 있는 근거 내지는 토대의 내용에 관한 무엇이다.
우리는 예술이 품고 있는 인간과 세계의 비밀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은 신들을 가까이 모시던 성스러운 과거 시대와는 달리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절실함을 안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예술가들은 둔탁해진 창(槍)을 다시금 비밀스러운 방향으로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과거에 나타난 어떤 성스러움이 더 이상 예술 영역 아래로 추락할 수 없듯이, 표현주의 예술은 어두운 색감 속에서 밝음을 유지한 채 유토피아의 내용을 담은 방향을 중시할 것이다. 그렇기에 표현주의 예술 작품은 도래하는 “파루시아 Parusia”의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역주: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는 “곁에 para + 존재 ousia”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기다린 진리의 결정적인 현현”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술가는 자신의 내면이 요청하는 바를 그대로 돌출시켜서, 인식과 설교의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인 빛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주어진 미적인 형상들은 마치 고림된 섬처럼, 혹은 찬란하게 타오르는 유리에 관한 그림처럼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원적 특징을 계속 암시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유형이야말로 마지막 카테고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한 미학적인 해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모든 게 묵시론적으로 변혁을 거치지 않는다면, 사물들은 과연 어떻게 완성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이 최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도약할 수 있도록 추동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일견 표현주의의 방식으로 축약되고 어떤 직접적인 양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내면의 고결한 빛을 완전히 밝히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빛은 인간과 세계 속에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장 속의 피가 사물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게 하는 비약일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노력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채 차단되어 있고, 우리를 눈부시게 하며, 다른 종교인들의 사고 속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위대한 작품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빛의 흔적이고, 예견을 위한 찬란한 별이며, 어둠을 지나치며 귀가하게 하는 위안의 노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술 작품 속의 먼 곳, 후광, 빛의 잔영 그리고 지상의 모든 완성에 관한 명징한 모순 등은 갈망하는 인간이 깊은 절망 속에서 찬란한 무엇을 예견하도록 직접 자극하지는 않는다,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에는 예술적 양식이나 유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고대의 사람들은 성스러움 가까이 다가가서, 자신의 시선으로 신들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예술적 시각 속에는 이를테면 날짐승, 상부 사원의 기둥, 교회 횡랑(横廊)의 비밀, 동화, 초월적으로 연결되는 영웅서사시, 찬란한 광채를 받는, 현세와 대비되는 신들의 삶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흐릿하고, 안개 자욱하며, 석양의 따뜻한 열기로 밝아오는 분위기를 생각해 보라. (역주: “미학 Ästhetik”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감각적 지각Aisthesis”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알렉산더 G. 바움가르텐 Alexander G. Baumgarten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책 제목을 “Aesthetica”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단어는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 설명되었고, 미학의 최초 표현으로 굳어졌다.)
지나간 세계의 논리는 그 자체 신의 논리이지만, 오늘날의 예술적 아우라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대의 예술 작품 속에 놀랍게도 우리의 비밀 내지는 세계 근거의 비밀로 치환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 Dostojewskij 그리고 스트린드베리 Strindberg가 추적한 바 있는, 순수한 영혼의 현실 영역인데, 이는 어떤 초-사회적인 인간다움을 관통하고 아우르게 한다. 두 작가는 인간사의 여러 가지 만남을 서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서 어떤 순수한 도덕적 초월을 지향하고 있지 않는가? (역주: 도스토옙스키와 스트린드베리의 문학적 특징은 “균열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지 모른다. 1. 두 작가는 인간을 이성적 도덕적 존재로 대하지 않고 내면의 극단적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2. 두 작가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구약성서의 욥 Hiob처럼 신과 진리에 대한 끝없는 의혹을 저버리지 않는 경향을 지닌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구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지만, 스트린드베리의 인물들은 이를 끝내 파기하려고 한다. 3. 두 작가는 인간 존재의 광기 그리고 환각을 극단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찬란한 색채의 후광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에 관한 예리한 계시를 접하게 된다. 예술 작품 속에는 은폐된 태양이 등장하곤 한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세계 내부에서 잠재적으로 완성되는 예술을 직접 접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은폐된 태양 속에는 아무런 상을 지니지 않고, 작품 또한 존재하지 않는, 어떤 최상의 무엇을 찾으려는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갈망 속에는 어떤 보조 수단으로서의 객체가 자리하지 않으므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에너지로서의 심장이 재탄생할 수빆에 없다. 그렇게 되면 -모든 예술의 배후에는- 내재성 그리고 세계의 도덕과 형이상학이 어떤 새로운, 아무런 매개체 없는, “비-셰계 Unwelt”라는 주관성이 실존하는 무엇으로 버티고 있을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내재성은 직접적 대상, 종교적 대상 등의 초월과는 구분되지 않는가?


영혼과 형식 한국어판. 홍성광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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