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 에른스트 블로흐 연구. 서문

필자 (匹子) 2026. 4. 18. 06:23

 

1.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폭넓고 심원하다. 부르크하르트 슈미트Burghart Schmidt는 16권으로 구성된 블로흐의 전집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반 문헌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철학적 자양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슈미트의 이러한 발언에서 최소한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그리고 허버드 마르쿠제 등의 학문적 공헌 이상으로 블로흐 사상의 놀라운 폭과 깊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블로흐의 사상이 비판 이론의 이른바 대안 없는 아포리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블로흐 연구는 국내외적으로 미미한 실정이며, 특히 신학의 영역에서만 유독 활발하게 회자하고 있을 뿐이다.

 

2.

본서는 한마디로 블로흐가 추구하는 물질 이론 그리고 희망 철학의 핵심 사항을 구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가 블로흐의 과정과 변화를 중시하는 존재론이라면, 후자는 갈망과 더 나은 세상을 선취하려고 하는 인식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학제적 관점에서 천착하려고 한다. 첫째로 변모와 과정의 특징을 지닌 블로흐의 물질 이론은 프리드리히 요제프 빌헬름 셸링의 세계영혼에 관한 논의를 자극한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 그리고 생태계 파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인문학적 관점의 생태주의를 태동하게 한다. 본 연구는 자본주의로 지배당하고 있는 인류세의 시대에 우리가 보존해야 하는 생태주의의 가능성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로 희망의 유토피아는 블로흐가 추구하는 “굶주림”이라는 자기 보존의 충동과 연결되는 것이다. 굶주리는 자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며, 세계 변화의 계기를 찾는다. 이러한 내용은 예술에서도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는데, 이로써 전개되는 것은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사회 경제적 가능성이다. 셋째로 블로흐의 희망 철학은 사회 개혁과 역사의 변화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민중 신학 내지는 해방신학의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블로흐의 “낮꿈”, “유토피아”, “전선Front” 등과 관련된 사고가 가령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요한 밥티스트 메츠 등의 해방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미리 말하자면 블로흐의 사상은 학문적 영역을 고려할 때 방대하고 폭이 넓지만, 학문적 의향을 고려할 때 미래 지향성, 변모의 과정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단 필자는 블로흐의 문헌에 관하여 도표에 표기된 여덟 가지의 영역을 언급하려고 한다.

 

(1) 역사학: 블로흐는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als Theologe der Revolution』 (1921)에서 16세기에 발발한 독일 농민 전쟁의 시작과 그 의미를 구명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블로흐에 의하면 19세기 유럽에서 처음으로 태동한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 가령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뮌처 등과 같은 무장봉기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2) 심리학: 블로흐의 저서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 (1959) 제1권에서 블로흐는 프로이트, 아들러, 카를 구스타프 융 등이 추구한 성 충동, 권력 충동, 도취 충동 등을 비판하면서, 무엇보다도 굶주림과 가난이라는 자기 보존 충동을 내세우고 있다. 특정 인간은 가난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으로서 개인과 사회의 경제학적 제반 조건을 탐색할 수밖에 없다.

 

(3) 철학: 블로흐는 『주체와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Subjekt und Objekt. Erläuterungen zu Hegel』에서 헤겔이 추적한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를 역사적 비판적 시각에서 치밀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밖에 중요한 것은 물질에 관한 철학사적인 해명이다. 이는 블로흐의 저작물 『물질 이론의 문제점. 그 역사와 실체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 그리고 『물질의 로고스Logos der Materie』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4) 신학: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제5권 그리고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원제: Atheismus im Chritentum)』 (1968)는 원시 기독교가 “사랑의 공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간 신”이라는 이유에서 절대적 권능을 지닌 신의 개념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re + ligio) 태초의 알파 신앙이 아니라, 마지막 세계를 추구하는 오메가 신앙이라고 한다.

 

(5) 정치학: 블로흐는 『이 시대의 유산Erbschaft dieser Zeit』에서 파시즘의 근원 그리고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가 도래하게 된 결정적 정황을 비판적으로 서술하였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사회 구성원 (농민과 도시 근로자) 사이에는 세계관의 차이가 공존하는데, 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용어로 해명될 수 있다. (6) 경제학: 블로흐는 여러 문헌에서 마르크스가 암시한 “자유의 나라”에 관해서 밝히고 있다. 자유의 나라는 자본의 확장보다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비라는 자유로운 삶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블로흐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상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미시적인 정치경제학의 과업 외에도, 자유의 나라를 예술적으로 선취하는 거시적 미학적 과업이다.

 

(7) 법학: 자연법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법적 이상을 추구하는 법으로서, 실정법과는 차이를 지닌다.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Naturrecht und menschliche Würde』에서 블로흐는 어떻게 하면 국가의 공권력을 가리키는 “행동 규범norma agendi”을 지양하고, 촛불 집회에 해당하는 “행동 능력facultas agendi”을 강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학문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8) 문학 그리고 예술: 블로흐에 의하면 위대한 예술은 더 나은 삶에 관한 가능성의 모델 그리고 이와 결부된 “선현Vorschein”을 반영한다. 왜냐면 예술가는 지금 여기라는 실제 현실의 정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현실 상을 선취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