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2) 에른스트 블로흐 연구. 서문

필자 (匹子) 2026. 4. 19. 07:03

(앞에서 계속됩니다.)

 

4.

본서의 첫 번째 주제는 물질에 관한 이론이다. 첫째로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그 자체 “첫 번째 존재το πρώτο ο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행동하는 에너지ένέργεία”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세상에 드러나는 현존재가 추구하는 최종적 형태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 물질이 존재이며, 에너지라는 말은 물질 속에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특징이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물질은 운동성의 개체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을 “가능성을 지닌 존재δύνάμει ν그리고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κατά το δυνατόν으로 구분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둘째로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물질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성이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변모 내지는 변화의 과정이다. 물질은 딱딱한 고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유연하게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내부적으로 저장하고 있는 형태를 바깥으로 산출한다. 현-존재를 자극하는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아님Noch-Nicht”이라는 특징이다. 무언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 결손 내지는 결핍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아직 아님”이라는 존재론적 자극을 통해서 존재로 진행해 나간다. 이러한 진행은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블로흐가 강조하는 “목표 대신 과정”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셋째로 물질은 그 영역에 있어서 자연과 세계뿐 아니라, 인간 의식 그리고 정신을 포함(包含)한다. 인간과 세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서로 구분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들은 절단되어 있지 않고, 양단적(両端的) 특징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물질은 우리가 외부적으로 대한 현실 내지는 외부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 그리고 의식을 포괄하고 있다.

넷째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질 이론의 논의에서 17세기에 라 메트리La Mettrie와 돌바크d'Holbach 등이 추적한 기계적 물질 이론을 하나의 조건 없는 긍정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물리 역학에 근거하는 이러한 물질 이론은 물질의 질적이고 변증법적인 변화를 충분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레닌은 “어리석은 유물론보다는 영특한 관념 이론이 영특한 물질 이론에 더욱 가깝다.”고 선언했는데, 편협한 유물론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다섯째 블로흐는 자연 주체의 개념을 통해서 셸링이 언급한 세계영혼의 가치를 기술과의 관련성 속에서 재정립하고 있다. 인류세에 신유물론이라고 명명되는 새로운 물질 이론은 데카르트 방식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셸링과 블로흐의 자연 주체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해준다. 가령 일부 신유물론자는 소재에서 형태로 변화시키는 물질을 능산적 기능을 지닌 “모성Mater 내지는 “(존재의) 자궁Schoß”이라고 규정한다. 다른 일부 신유물론자는 물질의 내재적 운동을 지적하면서, 양자 이론의 관련성 속에서 운동의 이러한 우연성을 “방행적pedetic”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자가 에코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질 이론이라면, 후자는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과 토머스 네일Thomas Nail 등이 내세우는 사변적 실재론이다.

 

본서의 두 번째 주제는 블로흐가 수미일관 천착한 희망에 관한 사항이다. 희망은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으로 요약되는데,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주제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로 인간에게 결핍된 충동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굶주림의 충동이다. 인간의 위(胃)는 “긴급하게 (음식을) 채워 넣어야 하는 램프”와 다름이 없다.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낮꿈, 즉 백일몽이다. 블로흐가 추구하는 자기 보존 충동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을 직시하게 한다. 이로써 낮꿈은 자신의 삶은 물론이며, 세계의 더 나은 변화에 관해서 깊이 숙고하게 한다.

둘째로 블로흐의 희망은 낮꿈, 즉 더 나은 세계를 갈구하는 백일몽을 내용으로 한다. 이로써 바람직한 사회의 상, 즉 유토피아의 모델이 탄생한다. 그것은 국가 소설에 반영된 더 나은 사회의 정태적 구도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모어, 캄파넬라 등이 설계한 사회 유토피아가 유토피아 모델로 명명된다. 그런데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영역을 확장했다. 왜냐면 국가 소설의 정태적 구도에 관한 해명 외에도 찬란한 미래를 갈구하는 갈망 속에서도 얼마든지 유토피아의 성분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시아와 구원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기대감은 나중에 가난과 억압을 떨치려는 무산계급의 열정으로 이어졌다. 가령 마르크스가 상정한 “자유의 나라” 내지는 20세기 초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블로흐에 의하면- 옳든 그르든 간에 지상의 천국에 관한 기대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셋째로 희망은 원래 갈망하던 바대로 고스란히 실현되지는 않는다. 왜냐면 인간의 갈망은 완전히 충족되지 않고 환멸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블로흐는 이를 “성취의 우울” 내지는 “실현의 아포리아Aporie des Erfüllens”라고 명명했다. 인간이 갈구하는 바는 전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사라지거나, 일부의 결과만을 안겨줄 뿐이다. 블로흐는 이에 대한 범례로서 연금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예로 들고 있다.

넷째로 희망은 미래의 사항을 내용으로 삼는다. 미래는 마치 신기루처럼 의식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불과 5분 이후의 삶조차 예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문의 역사에서 ”재기억αναμνησία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기억에 근거하는 사고는 과거 지향적으로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Nihil sub sole novum라는 보수 반동주의와 결착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에는 원전 중심주의, ”미메시스μίμησις와 같은 모방 이론, 숙명론 등을 조장하여, 진보 내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파기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자신의 희망 철학에서 재기억 대신에 ”새로운 무엇Novum“이라는 의미를 수미일관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로 블로흐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인류의 궁극적 목표라고 규정하면서, ”고향Heimat의 개념을 강조한다. 고향은 인간이 찾아가는 최종적 유토피아의 장소일 수 있다. 예컨대 스파르타쿠스는 노예 해방을 외치면서 무장봉기를 실천했고, 토마스 뮌처는 지상의 천국을 부르짖으면서 농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들이 무력을 사용한 까닭은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이 일반인들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블로흐는 권위주의의 권력과 금력에 굴종하는, 창세기의 알파 신앙 대신에, 저항과 반역을 도모하는 계시록의 오메가 신앙에서 최종적 유토피아의 해답을 찾고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