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니체의 '탈윤리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필자 (匹子) 2026. 3. 30. 11:15

 

어째서 한국 학자들이 그렇게도 니체를 애호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니체 전집 21권이 한국에서 완간되었다. 그런데 블로흐 전집 가운데 불과 다섯 권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뿐이다. 니체는 서양의 학문적 주류를 부정하는 이단의 사상가이다. 플라톤과 아르스토텔레스 그리고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이다. 사실 니체의 사상에서 부분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지엽적인 내용은 참으로 많다. 나는 니체의 독일어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정교한 문장을 읽을 때, 감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니체의 독일어에 비하면 블로흐의 독일어는 너무나 지저분하고 유장하다. 그러나 사상적 내용이 중요하지, 표현과 문체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니체의 사상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1. 그의 사상은 낯선 베짱이의 유미주의에 매우 근친하다. 2. 고해의 현실을 추적하는 그의 시각은 소시민적 이방인의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그의 사고에는 처음부터 어떤 계급 갈등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연대하려는 협동적 유토피아의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기에 니체라는 올챙이는 쇼펜하우어, 슈펭글러, 클라게스 등과 함께 허무적 실존주의라는 우물 속에서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다. 4. 또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그의 논조는 시종일관 팔루스 중심적이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마초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많다. 5. 그의 초인 사상은 정치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파시즘의 영웅주의라는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Fr. Nietzsche, 1844 - 1900)의「탈윤리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Über Wahrheit und Lüge im außermoralischen Sinne)」는 1873년에 집필되었으며, 1986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니체의 글은 칸트 사상을 급진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형이상학의 해체 작업의 소산이다. 여기서 니체는 (쇼펜하우어, 홉스, 다윈 등이 다룬 바 있는) 결코 기만될 수 없는 언어의 특성에 관한 문제를 규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니체의 "음악의 정신에서 나온 비극의 탄생"에서 발표된 책 내용으로부터 결별한 것이라고 믿으면, 이는 잘못이다. “나약함의 페미니즘” (니체)에서 비롯하여 함부로 철학적 형이상학으로 드러낸 것은 심층적으로 볼 때 기껏해야 “문학적 패러디”에 다름이 아니다.

 

모든 비판적 철학과 낭만주의 문학의 핵심적 문제는 폴 드 만에 의하면 미학 그리고 오성적 판단 사이의 관계라고 한다. 니체의 사상은 가령 “진정한 세계는 마침내 우화가 되어버렸다”라는 명제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문학적 묘사는 무엇보다도 “개념시 (Begriffsdichtung)”에 담겨 있다. 니체에 의하면 어떤 진정한 세계에 관한 인식론적 추론은 오로지 하나의 가상성을 밝혀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상들만 일컫기 때문이며, [게르버 (G. Gerber)의 수사학이 가리키는 대로] 형이상학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기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면, 인식론적 논의는 그 자체 문학으로 탈바꿈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예술의 낭만주의적 해석이 형이상학의 어떤 조직으로서 단순히 전복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니체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대립은 명확히 정해질 수 있다”라는 가설을 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환유적으로 부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임의적으로 표시된 부호로 인해서 상기한 대립을 명확하게 부각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술 작품속에 담긴 다의적 특성은 학문으로 조절될 수 없지 않는가? 확실한 지식이 개념의 명징성을 추구하는 서양의 인식론의 “이름”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니체의 견해에 의하면- 잘못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그것은 메타퍼, 환유, 신인 동형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인간 관계들의 총체들이다.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는 언어 이론가, 게르버 (Gerb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재확인시켜준다. “언어는 (때때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은유적으로 기술되며, 이로써 문학, 다시 말해 예술이다.” 이러한 결론은 -“시인은 속성상 속이는 사람이다”라는 플라톤의 경박한 비난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문학, 언어 그리고 사고 등을 보다 깊은 중의적 특성속으로 추락시킨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것은 오로지 거짓된 문학에 불과하다. 모든 은유적으로 창조된 견해는 모든 은유적으로 창조된 견해는 오직 어떤 세력의 힘에 의해서 (다시 말해) 인습적인 강요에 의해서 가상성을 비켜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삶”속에서 개념화되고 “발견된” 진리로 스스로 주장하게 된다. 텍스트의 다의적 은유성은 니체에 의하면 실제 필연적으로 한가지 의미로 중개되며, 이로써 정해지는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그러한 인습적 특성 때문에 합법화되거나 불법화된다. 니체는 이러한 역설을 나중에 “권력에의 의지”로 규정하였다.

 

지금까지 순수 미학자들은 니체의 “삶”, “자연”, “의지” 등의 사고를 잘못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니체의 활력주의는 마치 신비로운 은유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수용되었고, 이를 히틀러식 국가 사회주의의 정점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해체를 통해서 니체가 생각하던 역설이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가령 쟈크 데리다의 "법의 힘 (Force de Loi)" (1990)을 읽으면, 우리는 역설의 해결이 더 이상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의지”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