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부르크 출신의 (잊혀진 그러나 탁월한 문명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소설가이자 극작가, 한스 헤니 얀 (H. H. Jahnn, 1894 - 1959)이 남긴 작품 가운데 「메데이아」가 있습니다. 한스 헤니 얀은 특이한 인물입니다. 평생 오르겔을 제작하며 먹고살았으며, 17세기의 오르겔 곡을 편집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성연애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친구였던 한스 마이어 H. Mayer의 말에 의하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몹시 꺼렸다고 합니다. 그의 비극 「메데이아」는 1926년 5월 4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나, 여러 번에 걸쳐 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59년에 마침내 완성되어 1964년에 비스바덴의 국립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메데아 소재는 이미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 Euripides에 의해서 기원전 430년경에 극작품 「메데이아 (Medea)」로 집필되었고, 독일 문학 작품으로서는 1821년에 오스트리아 작가 그릴파르처 (Grillparzer)에 의해서 극작품 「금양피 Das goldene Vließ」로 작품화되었습니다. 얀은 메데이아 소재에다 가급적 이집트 문화의 흔적을 가미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백인의 배타주의적인 유럽 문명에 대한 작가의 강한 비판으로 나온 것입니다.
나아가 얀의 작품 「메데이아」는 오늘날 현대의 “인종 문제”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였는데, 이에 관해서 얀은 어느 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타민족을 야만인으로 규정했듯이, 오늘날 유럽인들은 흑인, 말레이 사람들 그리고 중국인들을 그렇게 생각한다. 유럽인들의 파렴치한 관습 가운데 하나는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개별적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이다. 전체적 범위에 있어서 메데아와 이아손 사이의 이루어진 결혼 다시 말해서 (타 인종 간의 혼인)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기 위해서 나는 주인공 메데이아를 흑인 여자로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얀의 극작품에서 메데이아는 흑인 여자로 등장합니다. 그 외의 경우 극작가는 전해 내려오는 메데이아 소재를 많이 변화시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콜히스의 공주가 아니라, 이집트 여신의 이시스 사원을 수호하는 여사제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그미는 남동생과 함께 순수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날 아르고 호를 타고 온 그리스인 이아손에게 연정을 느낀 그미는 그와 그와의 사랑 때문에 귀한 물건인 금양피를 찾아주고, 급기야는 동생을 살해합니다. 그리고나서 그미는 이아손을 따라 그리스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아손은 수년 후에 자신의 고향에서 메데이아를 헌신짝처럼 저버립니다. 말하자면 이아손은 다른 인종의 이방인 여자 메데이아와 계속 살아가는 것보다는 크레온 왕의 딸 크로이사 (신화에서 전해 내려오는 글라우케라는 이름과는 다르다.)와 결혼하여 사는 게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메데이아의 나이는 더 이상 젊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로서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메데이아는 질투 반, 복수 반으로 쌍둥이 두 아들을 살해합니다. 그리하여 시체를 깊은 동굴 속에 던져버립니다.
깊은 동굴 속에서 쌍둥이 두 아들은 신의 은총을 받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얀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 신화를 분명하게 가미시키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작가 얀에게는 잔인하고도 독선적인 서양 문명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세계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이로써 그미는 어떤 낯선 문명의 세계 그리고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결정주의로 예속시키는 심리적 충동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리하여 메데이아는 대양의 아랫부분 그리고 수천 개의 깊은 분화구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죄짓게 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결코 비극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결국에 가서는 메데이아는 비 유럽적인, 도취적인 성스러움의 세계를 다시 축조합니다.
얀은 고대 그리스의 극적 요소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극작품에서 합창을 동원한 바 있는데, 얀은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얀의 작품 속에는 아무런 죄 없이 고통을 당하는 노예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합창을 부르고 있습니다. 합창은 메데이아를 둘러싼 감동적인 사건들을 시적으로 논평하는 기능을 지닙니다. 얀은 놀라운 격정을 간결하게 그리고 미묘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을 시적인 암호로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스 헤니 얀은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다시 수정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작가 자신이 아니라, 독문학자, 카프카 연구가 빌헬름 엠리히 W. Emrich였습니다. 엠리히는 얀의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얀의 이 작품을 1945년 이후로 독일어로 집필된 문학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얀의 극작품 메데이아는 오늘날 현대의 니힐리즘으로 명명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근원, 비판 그리고 극복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 고찰할 때도 고대의 비극의 구조를 그렇게 멋지게 현대의 시적 언어로 옮긴 것은 호프만슈탈 Hoffmannstahl 이래 처음의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한스 헤니 얀은 소설 집필 외에도 오르겔 제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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