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질문: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종교적 사상가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저작물은 급진적 사회주의를 개진하고 있는데, 특히 기독교의 신교 그리고 구교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실정입니다. 당신의 사상 속의 어떤 부분이 종교, 특히 기독교와의 접점을 마련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블로흐: 당신의 질문은 그다지 놀랄만한 게 아닙니다. 이에 대한 대답 역시 그렇게 새롭고 기이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의 책, 『희망의 원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여러 번 실려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종교는 마치 태양 속의 가잘 강력한 홍염(紅焔)과 같은. “부풀어 튀어나오는” 희망의 불꽃을 피어오르게 하지요. (역주: 여기서 “부풀어 튀어나온다 protuberae”는 라틴어 표현이다. 물리학자들은 태양의 열기는 가스 덩어리인데, 태양 바깥으로 “부풀어 튀어나온다”고 표현한다,). 이렇듯 인간의 믿음 속에는 수많은 소망, 갈망의 꿈, 갈망의 시간, 갈망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희망이 가라앉게 되면, 이와는 정반대되는 공허함 역시 완전히 사장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현실은 마치 텅 빈 영역처럼 보입니다. 물론 어떤 찬란한 섬광이 번득이는 텅 빈 영역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이를 공허함으로 느낄 것입니다. 허공 말입니다. 이와 관련되는 가장 소박한 표현은 지루함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대담한 표현은 아무래도 절망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에 도래하는 니힐리즘을 생각해 보세요. 절망감 그리고 권태는 우리기 견지하고 있는 순수하지 못한 뒤섞인 감정이니까요. 완전히 불에 타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루함은 계속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루함과 연결된 적막함 그리고 무지(無知)에 관해서 세밀하게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나중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인간이 모조리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갈망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유토피아의 사고를 하나의 영양으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예견 역시 충분히 가꾸어나가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의 상태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서구에는 ‘다원주의의 지루함pluralistische Langeweile’이 존재하고 있으며, 동구에서는 ‘단선적 암벽과 같은 지루함monolithische Langeweile’이 퍼지고 있지요. (역주: 블로흐는 1960년대의 동서독의 사상적 정치적 분위기를 다원주의의 지루함 그리고 단선적 암벽과 같은 지루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독에서는 “무엇이든 상관 없다.anything goes”는 수수방관주의가 자리하고 있다면, 동독에서는 하나의 철칙만을 내세우는 하나의 독단론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 특히 동독에서는 하나의 주형에 의해 굳건한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어서,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정체되어 있지요. 사람들은 말로써만 목표를 이야기하고, 마치 축하 인사처럼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말은 아무론 유효성을 지니지 못한 채 주위 사람들을 그야말로 질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상태가 그러합니다. 만약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이라는 생명체로서 처해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원천적으로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여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지요. 앞날을 미리 바라보려는 태도는 우리의 힘이며, 우리의 운명과 같습니다.
현재의 이러한 상황은 기이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여러 장애물이 곳곳에 버티고 있지요. 텅 빈 영역에 불꽃만이 마치 폭죽처럼 피어오를 뿐입니다. (역주: 여기서 블로흐는 지루한 분단의 상태 속에서 어떤 불꽃이 피어오른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68 학생 운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만약 이러한 불꽃이 그냥 사라지지 않고, 핵심적 면모를 갖추면 좋을 텐데요. 사회적 차원에서 고찰할 때 경제적 생산 에너지가 성장한다고 해서 이를 감내하는 기술 지배 역시 성숙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어디서든 간에 어디로 향해 나아갈 것인가? 같은 계획표 내지는 차 시간표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사회주의가 없으면, 결코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을 것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즉 민주주의가 없으면, 사회주의 또한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회주의는 아직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역주: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블로흐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이의 의견 대립을 읽을 수 있다. 소련은 많은 하자를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하자들이 수정된다면, 어쩌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블로흐는 믿었다. 이에 반해 아도르노는 소련 사회주의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며, 발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이는 학자 사이의 견해 차이이며.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 나타난 것이므로, 역사적 비판적 차원에서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이를 회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무작정 실망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사회주의는 아직도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아요. 현재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미명으로 영위되는 국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인간의 삶의 특징은 노동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권태를 가리킵니다. 교회와 성당은 자유 시간을 관장하면서 노동 외의 삶을 돌보는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걱정이나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일과 관련되지요. 교회 사업 속에는 여러 가지 사항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물화 현상, 믿음의 고착화라든가 독단적 견해들이 얼마든지 자리합니다. 나아가 종교적 가르침 속에는 많은 신화적 사항들이 자리합니다. 현대인들이 학문 이전의 세계, 신화적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지만 말입니다. 물론 교회와 성당 사람들은 현대적 관점에서 이러한 전근대적 내용이 선교 활동에서 배제되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체제 자체가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유형 그리고 믿음의 장소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속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공동의 체제 내지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장소는 개방된 모습으로 머물게 되지요. 물론 신앙인들의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이와 결부된 혁신의 나팔을 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래야말로 거대한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 관한 철학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두 명의 철학자의 두 문장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철학자는 종교와 커다란 관련성을 지니지 않지만, 두 번째 철학자는 근본적으로 종교 철학을 탐구한 사람입니다. 칸트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몽주의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나타난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출구다.” 이것은 세계로부터 창안해낼 수 있는 무엇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노예 상태를 인지하고 이로부터 벗어니려고 노력하는 자야말로 계몽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입니다. 인간 삶의 조건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미성년 상태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지요. 두 번째는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입니다. “우리는 일곱 번째 날에 우리 자신이 되리라. Dies septimus nos ipsi erimus.” 이는 다음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해방의 날은 어딘가 우리 앞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왜냐면 주는 창세기 이후에 그냥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만끽해야 하는 일요일은 여전히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칸트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은 서로 접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른이 된 다음에 마지막 일요일을 만끽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전언의 한 가운데에는 하나의 장소가 존재합니다. 그곳은 바로 책임, 냉정함 그리고 하나의 척도를 갖춘 장소입니다. 두 가지 내용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제각기 따로 놀게 되면, 맹목성과 공허함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두 가지 사항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살입니다. 즉 우리는 어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연속적으로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래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로써 우리는 구체적 임무를 정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자리하는 공허한 현실적 공간 그리고 간간이 빛을 발하는 불꽃 등을 예리하게 통찰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이 희망 철학의 관건이니까요.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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