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제2부에서 “낯선 자”는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숙명과 처절하게 싸우려 합니다. 숙명은 마치 어떤 더 높은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이리저리 조종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느 도미니크 수사를 만납니다. 수사는 제1부에서 등장한 바 있는 거지, 바로 그 수도사로서, 무언가 주인공을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수사는 “낯선 자”를 수호하는 정령으로서, 그를 배후에서 돕고 교화하려는 인물이지요. 어쩌면 수사의 도움을 통하여 고통과 고독 속에서 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낯선 자”는 드디어 여자와 만나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우를 수 없는 갈등이 자리합니다. 결혼 부부는 하루의 반나절에는 마치 천사의 만남처럼 순결함을 감지하지만, 다른 반나절에는 악마처럼 상대방을 괴롭힙니다. 여자의 얼굴은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어머니로 비칩니다. 여성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뒤섞이며 나타납니다. 이는 스트린드베리의 여성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타이탄의 존재에 근접하여 그들에게서 금 제련의 기술을 배우려 합니다. 왜 자신이 기술을 배우려고 할까요? 그것은 세상의 질서를 정립하거나 파괴하기 위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나는 세계의 창조자요 파괴자이니라. 모든 사물이 재로 화하게 되면, 나는 세계사의 마지막 페이지 집필을 끝내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오랜 연습 끝에 마침내 금을 제련해냅니다. 그의 명성은 서서히 세상에 퍼져나갑니다.
7. 거대한 향연이 개최되어, 주인공은 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연금술로 더러운 세상을 황금으로 정화한 자로서 “낯선 자”를 거명합니다. 바로 이 순간 주인공은 온갖 찬란한 명예의 정점에서 추락합니다. 축제를 거행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마스크 차림의 술꾼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가치가 전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위대한 인간으로 존경받던 “낯선 자”는 순식간에 만인으로부터 경멸당하면서, 치욕의 비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위대한 연금술사”로 존경받던 주인공은 세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실험에 사용한 경비를 갚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낯선 자”는 교도소에 갇힙니다.
사람들은 “낯선 자”에게 저주라는 끔찍한 낙인을 찍습니다. 자고로 저주를 받게 된 자는 기쁨, 평화 그리고 은총 등을 만끽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 역시 저주받은 자가 되어, 지인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야 합니다. 주인공은 주어진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2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낯선 자”는 다시금 옛날의 모습으로 변하여 흉측하고 사악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교만과 악덕이 그의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오로지 교만과 악덕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는 신의 영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채 절망적으로 수도사 그리고 거지 등의 친구들을 초청합니다. “나를 찾아오라, 친구들이여. 내 마음 바뀌기 전에.”
8. 제3부의 첫 장면에서 “낯선 자” 그리고 수도사는 사원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겸허 그리고 복종이라는 시험의 단계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반항심과 저항 정신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인공은 영혼의 안정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도원으로 되돌아가서, “과거 자아가 겪어야 했던 죽음의 끔찍한 고통”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습니다. “낯선 자”는 언젠가 오래전에 안타깝게 이별해야 했던 자신의 딸, 실비아, 그의 아내 그리고 비너스를 숭상하는 사람들과 재회합니다. 이때 그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고 작심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리감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지식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신앙을 추구하기로 작심합니다.
어느 날 “유혹자”가 나타나 “낯선 자”에게 교묘히 접근합니다. 그는 교만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고 주인공을 부추깁니다. 그는 귀에다 다음과 같이 속삭입니다. 죄의식 그리고 후회란 그저 무기력한 자들이 고수하는 어리석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모든 죄를 부여한 자가 바로 신이라고 합니다. 유혹자는 놀라운 언변을 구사할 수 있는 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혹자”는 법정에서 질투심 때문에 사랑하는 임을 살해한 어느 남자를 변호하기도 합니다. 유혹자에 의하면 성서에 등장하는 이브 그리고 뱀은 아무런 죄가 없으며, 그들을 시험하게 한 신에게 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9. 주인공, “낯선 자”는 유혹자의 충고를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는 어느 젊은 여자와 재혼하여 즐겁게 생활합니다. 이로써 첫 번째 여자와의 감추어진 감정이 뇌리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어떤 저주스러운 사랑의 법칙이 따라다닙니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영혼은 여성에게서 더욱 멀어진다는 법칙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혼인이라는 조화로운 삶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서 세상과 화해하려는 희망은 하나의 환상으로 판명됩니다.
“낯선 자”는 수도원에서 신앙의 세계 속으로 침잠합니다.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터득하면서, 종교, 학문, 예술 사이의 어떤 일원성을 서서히 체득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낯선 자”는 “멜허 Melcher” 신부를 만납니다. 그는 신부에게서 뒤늦게 신앙의 기본적 가르침, 휴머니즘과 체험 사이를 이어가는 법 등을 터득해 나갑니다. “낯선 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과거의 자아가 죽었다는 듯이 검은 강보에 싸여 유명을 달리합니다.
10. 놀라운 것은 스트린드베리가 상황극의 특징을 도입한다는 사실입니다. 종래의 극은 기승전결 속에서 극적 대립을 서술하는 데 비해서, 상황극은 개별적 장면 사이의 인과적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사물의 질서와 사건이 인과율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이방인인 자아의 의식이 극적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위의 일원성은 자아의 일원성으로 교체되고 있습니다. (Szondi: 26). 따라서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논리가 아니라, 극적 자아가 겪는 내면의 의식입니다. “의식의 흐름”은 19세기 말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군중 그리고 자본주의의 익명성 등과 관련하여 나타난 서술 기법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익명의 파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피해당하는 의지를 극대화하려고 애를 씁니다.
작품은 주인공이 일곱 단계를 거쳐서 다시 일곱 단계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낯선 자”는 무대에 항상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는 전통적 의미에서 주인공, 즉 영웅의 기능을 고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면 구성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의 주관적인 의식과 무의식입니다. 스트린드베리는 자아가 처해 있는 끔찍한 절반 현실을 위해서 시간과 장소라는 전통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의상, 육체적 특징, 삶의 여건 등은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주변 인물들은 무의식, 두려움, 갈망, 모순 그리고 희망 등을 간헐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우미 역할을 담당합니다. 나아가 주인공의 거지 차림은 비록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취기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자유분방함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1. 제목이 사사해 주듯이 작품은 마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기독교를 탄압하던 유대인 사울은 주지하다시피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길에서 말에서 떨어져서, 내면의 신의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서 바울로 개명하는데, 뒤이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됩니다. 송옥은 이 작품의 주제를 구원의 갈망의 측면에서 고찰했습니다. (송옥: 176). 그러나 작가 스트린드베리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성서의 재구성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마스쿠스로 향하여를 심리극의 측면에서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스트린드베리는 자신의 작품 속에 19세기 말 유럽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의 심리적 갈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즉 “낯선 자”는 죽는 날까지 어디서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서도 사랑과 위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의 물질 중심의 계급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의 전형입니다. 주인공이 아픔을 딛고 살아가는 페르 귄트라는 점에서 힘들게 방황하는 현대인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다마스쿠스 방랑은 한마디로 자신의 내면과 싸우면서 더 나은 삶을 창조하려는 비극적 파우스트의 결기와 같습니다. 그러한 한 다마스쿠스는 자신의 내적 아픔을 떨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정서적 고향에 대한 객관적 상징의 장소로 이해됩니다.
참고 문헌
- 송옥: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구원의 갈망, in: 현대 영미 드라마, 16권 1호, 2003, 151 – 176.
- Diebold, Bernhard: Anarchie im Drama, Frankfurt a. M. 1921.
- Meyer, Michael. 1985. Strindberg: A Biography. Oxford Lives ser. Oxford: Oxford UP, 1987
- Sprinhorn, Evert, Strindberg als Dramatiker ,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2
- Szondi, Peter. 1965. Theorie des modernen Dramas: Eine kritische Ausgabe. Hrsg. und übers. Michael Hays. Theorie und Geschichte der Literatur, Band 29.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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