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a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박설호: (3) 모어 이후의 르네상스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6. 6. 18. 09:57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기독교의 세계관의 연장: 슈티블린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으면,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르네상스의 유토피아의 특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르네상스 시대에 출현한 대부분의 유토피아들은 유토피아 구상에 있어서 저세상이 아니라, 현세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모어 이후에 출현한 전통적 유토피아들은 고대의 삶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육체노동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공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열심히 노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슈티블린의 유토피아는 자연의 혜택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도를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중세의 기독교의 세계관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슈티블린의 유토피아는 현세의 안녕 대신에 내세의 안녕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육체적 노동 자체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행복 공화국』의 사람들은 그들이 우연히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니라, 신의 예정 조화에 의해서 함께 살아간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굳게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즉 신께서는 직접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공동체에 득이 되는 사람들을 찬양하고, 공동체에 음으로 양으로 해악을 가하는 자들을 징벌한다고 합니다. (Thomson: 112). 이렇듯 슈티블린은 자신이 설계한 행복의 공화국에다 기독교적 초월의 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렇기에 신은 지도자라든가 모든 고위 관료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고위 관직을 맡은 자들은 마치 신의 뜻이 그러하듯이 최상의 국가를 이끌어나가고, 원형으로서의 신의 상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전형적으로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상을 방불케 합니다.

 

18.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사고가 수용되어 있다.: 물론 모어 역시 플라톤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어의 눈에는 플라톤의 사상이 만인의 평등한 삶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투영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어는 오로지 플라톤의 『국가』 가운데 형식적 측면만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슈티블린은 모어의 경우와는 반대로 플라톤 사상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행복 공화국』을 이끄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죽은 다음에 천국의 사원에 영원히 거주하기를 바랍니다. 죽은 뒤에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난 자신의 영혼이 영원히 찬란한 천국에서 생동하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플라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 사고입니다. 즉 나라를 지킨 영혼들은 자신의 미덕에 대한 대가로 영화롭게 신들과 함께 머문다는 플라톤의 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19. 사유재산 제도의 인정: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인간의 노동이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어 있습니다. 가령 모든 유토피아 사람들은 농업 외에도 반드시 한 가지 수공업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를테면 500명의 재능 있는 사람들은 기술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약간의 특권을 누리는 셈인데, 플라톤의 『국가』에 타나나는 파수꾼 (군인)의 특권을 방불케 합니다. 모어의 경우 모든 것은 사회 전체의 공동의 안녕을 위한 조처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슈티블린의 작품의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슈티블린은 처음부터 사유재산 제도를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 공화국』의 경제적 삶은 16세기 유럽의 기존하는 사회의 그것과 별반 차이점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슈티블린의 유토피아가 평등 사회의 모범적 범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20. 노동의 경시: 슈티블린은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훌륭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고전적 유토피아에 의하면 인간의 노동이야 말로 사회적으로 높은 생산력을 보장해주는 경제적 메커니즘의 핵심 사항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모어는 “모든 사람은 하루 여섯 시간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철칙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슈티블린의 『행복 공화국』의 주민들은 기계를 사용하여 앉아서 무언가를 행하는 기술을 고상하지 못한 일감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경직된 상태에서 일해야 하는데, 육체적으로 불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Jahn: 81).

 

여기서 우리는 “도구 내지 기구를 사용하는 게 천한 행동”이라는 중세의 전근대적인 사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밖에 주민들은 더럽고 힘든 일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을 저열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슈티블린이 노동, 특히 수공업의 노동조차도 천한 일감으로 매도되고 있는데, 이러한 시각은 노동의 가치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중세의 고답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21. 혁신적 기술에 관한 학문은 없다.: 물론 슈티블린의 유토피아에서 과학 기술과 이에 관한 연구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지는 않습니다. 『행복 공화국』에서는 학문 연구의 필요성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슈티블린의 학문은 고대인들의 학문 이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티블린의 유토피아에서 언급되는 학문 분야는 대수, 기하, 천문학 그리고 음악, 그 이상을 도출해내지 못합니다. 이를 받쳐주는 문헌학으로서 세 가지 언어인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가 연구될 뿐입니다. 수학과 천문학의 경우 고대의 우주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며, 문헌에서는 나중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시도한 자연과학에 관한 귀납법적 연구에 대한 관심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가 슈티블린의 학문에서 자연과학과 관련되는 기술적 혁신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22. 도니의 『이성적인 세계Mondo savio: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작가, 안톤 프란체스코 도니의 문학 유토피아를 약술하려고 합니다. 원래의 제목은 자구적으로는 “현자의 세계”로 번역될 수 있지만, 내용상 “이성적인 세계”로 번역하기로 합니다. 도니의 작품 『이성적인 세계』(1552)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토피아의 역사에서 생략될 수 없는 문헌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모어의 유토피아의 모델을 급진적으로 단순화시켜서, 고대 사회에 출현한 아르카디아의 평등 사회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도니의 목가적 평등 사회의 유토피아는 18세기에 이르러 페늘롱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유토피아 모델 가운데 하나인, 태초의 원시 사회의 이상적 모델로 설계된 “베타케”와의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타케는 태초에 존재했던 목가적 무정부 상태의 이상적인 자연 사회를 가리킵니다

 

. 둘째로 도니의 유토피아는 모어가 강조한 가족 제도를 거부하고, 가족 체제가 파기된 여성 공동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혼 없는 여성 공동체의 체제는 맨 처음에 플라톤에 의해서 언급된 것인데, 도니에 의해서 다시 출현하였으며, 나중에 캄파넬라에 의해서 계승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입니다.

 

23. 도니의 삶 (1): 안톤 프란체스코 도니는 1513년 피렌체에서 가위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가톨릭 사원에 들어가서 “수사 발레리오”라는 이름을 얻어서 수도에 몰두하려 했으나, 답답한 사원의 생활에 식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혈기로 사원을 탈출하여 큰 세상에서 활보하며 살았습니다. 1542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피아첸차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그의 마음은 의외로 예술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 예술가들의 친목 단체인 “정원사의 아카데미L’accademia degli ortolani”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밀라노의 교회는 2년 후인 1545년에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단체를 해체하였습니다. 도니는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음악에 관한 대화 Dialogo della musica」를 집필하여 1544년에 발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세인으로부터 어떠한 관심도, 호평도 받지 못했습니다. 낙심한 도니는 메디치에게서 물질적 후원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마저 아무런 반향이 없었습니다. 결국 피렌체로 돌아온 도니는 인쇄소를 경영하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책자를 발간합니다.

 

24. 도니의 삶 (2): 아마도 이탈리아의 문학사에서 도니만큼 부지런하여 열정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작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문헌을 수집하여 이를 정리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도서관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게 된 것도 그의 덕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문학사 연구가들은 독일의 그림 형제를 떠올리면서, 도니를 “이탈리아의 그림Grimm”이라고 명명하곤 했습니다. 도니는 과거의 작품을 발굴하여, 이를 소개하는 훌륭한 해설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도니는 스스로 문학적 재능이 없다고 자평하였습니다.

 

도니는 자신의 능력을 일부러 낮춤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경계심을 가라앉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반드시 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리라고 결심한 도니는 베네치아로 가서, 피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명망 높은 작가에게 자신의 패러디 원고를 보냈는데, 아레티노는 내심 도니의 탁월한 재능에 탄복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피트로 아레티노는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틱한 소네트를 발표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도니가 더 이상 베네치아의 문단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그를 추방시키자고 선동할 정도였습니다. 1564년 도니는 베네치아를 떠나 방랑하다가 1574년에 몬셀리체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