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25. 도니의 성악설: 도니는 처음부터 인간 존재에 대해 커다란 기대감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도니에 의하면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과 이브가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았으리라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의 운명은 세 명의 여신이 짜는 실타래의 실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의 목숨은 세 명의 여신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클로토Κλωθώ가 실을 짜면, 라케시스Λάχεσις가 이를 감고, 모이라Μοἶρα가 운명의 실을 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자신의 내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지성은 언제나 본능에게 패배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도니의 사고는 처음부터 결정주의, 다시 말해 비관주의에 근거한 숙명론 속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관주의의 숙명론은 중세 말기에서 르네상스 초기로 이어지는 염세주의의 시대정신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26. 도니의 『이성적인 세계』의 주위 환경: 작품은 대화체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두 명의 등장인물은 현자와 바보입니다. 그런데 등장인물 바보는 나중에 주피터와 풍자의 신, 모무스로 밝혀집니다. 맨 처음에 현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꿈을 꾸었는데, 두 명의 방랑자가 그를 데리고 새로운 세계로 향했다고 합니다. 도니의 이상 국가는 하나의 별과 같은 모양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것은 별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성적인 세계』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그리고 안토니오 아벨리노Antonio Avelino의 건축물에서 착안해낸 모델이 분명합니다.
꿈속의 세계이기 때문에 도시의 국경의 외부에는 일견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시의 한 복판에는 100개의 문을 지닌 사원이 위치합니다. 사원에 달린 100개의 문에는 사통팔달의 도로가 뻗어 있습니다. 도로는 도합 10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쪽에는 거주지와 일터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도로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에는 여러 유형의 공장이 위치합니다. 가령 의상실 근처에는 포목점이, 약국 맞은편에는 병원이, 빵 공장 근처에는 제분소와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이성적인 세계』의 일부 사람들은 농업을 제외한 200개의 업종에 종사하며, 도시 내부의 일터에서 생활합니다. 성벽의 바깥에는 농경지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농산물을 재배하며, 가을에 결실을 수확하곤 합니다. 공산품의 경우에는 필요한 물품만을 생산해냅니다. 노동의 시간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으나, 하루 일과는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27.『이성적인 세계』사람들의 식사 그리고 의복: 모든 사람들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며, 물품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어의 경우와 대동소이합니다. 사람들은 점심시간에는 거대한 식당에 모여서 공동으로 식사합니다. 모든 물품과 음식은 사람 수에 따라 평등하게 나누어집니다. 『이성적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모형의 의복을 걸칩니다. 특권을 누리는 자도 없고, 노예도 없으므로, 같은 곳의 규칙에는 어떠한 예외조항도 없습니다. 다만 나이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10년의 간격대로 다른 색의 옷을 착용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상대방의 나이를 옷 색깔로 분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곳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 등을 외부로 드러낼 수 없으며, 오로지 나이 그리고 직업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개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얼마나 능률을 발휘하여 노동하는가? 하는 물음이 『이성적인 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28. 경제와 교육: 『이성적인 세계』에서는 사유재산제도가 철폐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공동 소유로 되어 있으니, 화폐도, 시장도 불필요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물품들의 수와 양을 미리 정해두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계량기도 필요 없으며, 측량기도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물품 보관소에서 그냥 가져가면 됩니다. 대신에 일하는 자만이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음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계율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이성적인 세계』에서는 세밀한 규정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의 영역이 단순하게 기술되고 있기 때문에 다소 모호한 측면 역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누가 더럽고도 힘든 노동을 담당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도니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과학 기술 및 이에 대한 활용에 관해서 도니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교육 제도 역시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만 6세가 된 아이들은 공동으로 생활하며, 국가로부터 교육을 받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불구 내지 장애아이가 태어날 경우, 사람들은 그 아이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대 도시 국가에서 행해진 관습이었는데, 도니의 유토피아에서 다시금 채택되고 있습니다.
29. 법과 정치 제도: 『이성적인 세계』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등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모어는 인간의 오만과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를 고안해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예 제도의 활성화였습니다. 그러나 도니의 유토피아는 복잡한 법령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특권계급도 없고, 노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지배계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100명의 사제가 조용히 도시의 100개의 블록을 관장할 뿐입니다. 이들은 일상의 행정 업무를 행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자인데, 그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권한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거의 출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정이 필요 없습니다. 결혼 제도가 없기 때문에 남녀 관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투쟁, 질투, 불화 등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무력 도발의 가능성은 전혀 없으므로, 군대 조직 역시 처음부터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30. 결혼 제도의 폐지: 도니의 유토피아에서 놀라운 것은 결혼 제도가 폐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혼을 폐지하면, 가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사라지겠지만, 대신에 공동체 전체의 결속감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고 도니는 믿습니다. 가족 제도가 사라지면, 죄악도 사라지게 되리라고 도니는 주장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족 제도가 없으면, 남편과 아내가 치정으로 살해당하지 않을 테고, 여성이 죄악의 모든 근원이라는 잘못된 평판도 사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지참금 등과 같은 결혼식과 결부된 재산 문제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 가문과 가문 사이의 자존심 대결도 출현하지 않습니다. 남녀 간의 성행위와 결부된 사기 행각 그리고 갈등도 없을 테지요, 여염집 규수들이 사악한 사내에 의해 겁탈당한 뒤에 남편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결혼 시에 집안을 따지고, 남자의 명예와 자존심 등을 거론하며 결투를 벌이는 일도 종적을 감추게 것입니다.” (Doni: 11f). 도니의 유토피아에서는 여성들이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혈통을 따지거나 신분 차이를 내세우는 일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니는 어째서 가족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공언한 것일까요?
31. 결혼과 가족 제도는 과연 사회악을 심화시키게 하는가?: 사실 모어는 이기심과 탐욕을 근절하기 위해서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일처제의 가족 제도에 대해 과감한 메스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모어의 작품에서는 한 가지 불명확한 점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유산 제도입니다. 비록 『유토피아』에서는 사유물이 존재하지 않지만, 부모의 유산에 관한 문제는 재화의 크기가 크든 작든 간에 해결되지 않은 채 온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유제라고 하지만, 가족이 존재하면, 최소한의 범위에서 사적인 소유물이 고려되기 마련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니는 일부일처제의 가족 제도가 국가와 사회의 가치와 중요성을 약화시키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족 제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가문 내지 가족만을 중시하게 하고, 공동체 전체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이기주의를 심화시키고 탐욕을 강화시키게 하는 동인이라고 합니다. 만약 가족 제도가 폐지된다면, 사회악 역시 제거되리라고 도니는 확신하였습니다.
32. 결혼과 가족에 관한 캄파넬라의 사고: 나중에 캄파넬라는 세 가지 사항을 언급하면서 도니의 상기한 입장을 추종하였습니다. 첫째로 결혼과 가족 제도가 파기되면, 도덕적인 죄악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둘러싼 가문과 가문 사이의 대립 역시 더 이상 출현하지 않게 되며, 결혼 자금 내지 지참금의 문제도 해결되리라고 합니다. 간통, 강간 그리고 치정 살인 역시 가족 제도가 존속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범죄라는 것입니다. 캄파넬라의 이러한 견해는 도니의 그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둘째로 결혼 제도와 가족 제도는 사회적 차별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혼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면,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문과 혈통이 사라지게 될 테고, 어느 누구도 사회적으로 차별당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로 남녀의 사랑에 어떤 사회적 장애물이 사라지면, 좋은 점이 많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결혼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면, 어느 누구도 짝사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라고 합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영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혼인제도는 일장일단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도니는 혼인의 폐단을 강조하면서, 여성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33.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에벌린, 슈티블린 그리고 도니의 유토피아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에벌린과 슈티블린의 경우 계층 사회가 폐지되지 않고, 관료주의의 이상이 은근히 드러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두 작품은 모어의 아류로 이해되며, 종교사적 차원에서 재론되는 문헌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니의 유토피아는 이와는 다릅니다. 『이성적인 세계』는 모어의 유토피아보다도 더 철저한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특권은 사라지고, 노예제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도니의 유토피아는 나중에 페늘롱의 두 가지 유토피아 가운데 하나인 “베타케”의 원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도니는 모든 사회적 죄악을 척결하기 위해서 결혼 및 가족 제도의 폐지를 주장함으로써 플라톤의 여성 공동체의 생활 방식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뒤이어 출현할 캄파넬라의 질서 유토피아에 반영됩니다. 캄파넬라는 결혼과 가족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여성 공동체를 용인하였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사랑의 삶 그리고 사회적 삶에 있어서의 모든 부자유를 떨칠 수 있다고 캄파넬라는 확신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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