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박설호: (3) 표현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논쟁

필자 (匹子) 2026. 1. 3. 10:57

(앞에서 계속됩니다.)

 

13. 모사 이론과 실증주의에 대한 블로흐의 비판: 막스 벤제 그리고 블로흐의 예술론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도구주의와 기술적 방식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블로흐가 아방가르드 예술적 기법을 경시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블로흐는 도구주의 내지는 기호학적인 전화기 이전에 구상한 유토피아의 기능을 고수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근본적 사상과 예술적 입장은 이러한 전환기의 특징을 받아들여서 변화를 거듭하는가? 블로흐는 “예술은 어떤 가능한 세계 내지는 가능한 존재 구조를 설계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심지어 막스 벤제의 기술 이데올로기 이론을 현대적이라고 평가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20세기 모더니즘이 거부하고 저항하는 모든 “모사 Abbildung”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능한 구조들은 예술적으로 투영된 상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날 뿐, 루카치가 말하는 “현실의 반영”을 통해서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막스 벤제에 의하면 예술 속에 내재하는 가능한 세계의 어떤 특징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어떠한 유토피아의 기능도 예술이라는 자생적인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벤제는 새롭게 변화되는 현실의 상은 예술적 생산을 통해서 종결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블로흐의 기본적 예술론을 지극히 현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예술적 상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는가를 용인하지 않는다. 이로써 벤제의 논의는 도구주의 그리고 기호학적인 전환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유토피아의 기능과 접목하지 않은 채 예술 기법적 영역에 갇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벤제가 내세우는 부호의 틀은 그냥 예술 기법 내지는 방법론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시각은 눈앞에 드러난 실증적 내용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루카치의 반영이론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14. 예술 속에는 유토피아의 기능이 담겨 있는가? (1): 블로흐는 예술에서 중요한 사항오르서 사회적 동인을 감지하게 하는 일을 지적한다. 1920년대 이후에 드러난 도구주의는 오늘날 산업 사회가 생산력에 방향을 설정하려는 욕구의 표현인데, 블로흐는 현대의 실험적 예술이야말로 이러한 성향을 깡그리 파괴하려 한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동시에 해체되는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지금까지 대학 강단에서 논의된 미학 이론이다. 예술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미적 동기는 세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심지어는 일견 미적인 요소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학적 영역, 예컨대 수학의 양적 영역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이로써 미적이고 예술적인 무엇은 철학자 셸링이 언급한 바 있는 오르가논, 즉 방법론적 원칙이라는 특징을 확보한 것 같다. 도구주의가 이에 대한 적절한 범례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기능을 고려할 때 블로흐의 사고에는 셸링이 유추한 방법론적 원칙으로서의 오르가논과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어떤 저항이 존재한다. 언젠가 하버마스는 철학자 블로흐를 “마르크스주의의 셸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Habermas, Merkur 153). 그렇지만 블로흐는 셸링 철학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뒤집고 있다.

 

15. 예술 속에는 유토피아의 기능이 담겨 있는가? (2): 셸링은 언젠가 “인간은 생산에 관해 언급할 때 생산 행위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은 철학 행위의 방법론으로서의 오르가논과는 일치되지 않지만, 마르크스와 블로흐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왜냐면 셸링의 문장은 인간의 노동이 더 나은 삶을 이룩해내고 얼마나 놀라운 인간 문화를 완성해내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로흐는 이러한 발언을 뒤집어서, 과감하게 예술 작품에 내재한 함의를 부여한다. 즉 “인간은 생산에 관해 언급할 때 생산물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예술 작품 자체가 예술적 생산을 위한 동인으로 작용한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결과물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산출하게 하는 놀라운 모티프를 제공하고 있다. 블로흐는 형체 이론적 관점에서 셸링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서 형체란 블로흐에게는 오로지 전망의 예견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전망의 예견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행위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예술 작품은 더 나은 미래의 상을 예술적으로 암시해준다. 무언가 예견하는 행위는 블로흐에 의하면 갈망의 획득을 통해서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거나, 소진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열망과 동기는 실현과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예술이 지닌 동기 부여의 기법은 원래의 주도하는 의향을 소진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법이 없다.

 

16. “희망의 원리” 비판: 그렇다면 블로흐의 예술 철학 속에는 하자가 없는가? 바르바라 슈미트만스Barbara Smitmans는 『희망의 원리』에 묘사된 이집트의 헬레나 상에 문제를 제기한다. (Brand-Schmitmans: 73). 블로흐가 묘사한 헬레나의 이중적인 상은 그리스의 현실을 외면한 유토피아의 상상으로서, 거기서는 고착된 완고함만이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블로흐의 책은 1950년대 구동독에서 현실적 경험의 폭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았다. 막스 벤제는 “희망의 원리” 대신에 학문의 원칙을 내세웠고, 헬무트 셸스키Helmut Schelsky경험의 원칙을 강조했으며, 한스 요나스Hans Jonas책임의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Schmidt, 85A: 254).

 

셸스키는 주어진 현실적 사건 그리고 인간의 실제 경험을 가장 중요한 사상적 동인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국가 사회주의는 동구의 기존 사회주의와 다를 게 없다. 두 가지 유형의 사회주의는 헛된 갈망을 미화하고, 개개인을 정치적 도구로 유인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셸스키에 의하면 개인과 사회의 경험으로 축적된 역사라는 것이다. 한스 요나스는 생태계 파괴 현상에 즈음하여 인간의 덕목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할 때 희망의 원리가 아니라, 책임의 원리가 현대 사회의 당면한 덕목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한다. (요나스: 24).

 

17. 갈망의 에너지, 블로흐의 실증주의 비판: 철학은 겉으로 드러난 현실, 가시적 내용 그리고 자연과학적 법칙만을 중시해야 하는가? 블로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갈망에 도사린 놀라운 동인에 집중한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헬레나를 거론한다. 메넬라오스가 만난 여인은 그리스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첫 번째 헬레나가 아니라, 실제로 평범한 두 번째 헬레나였다. 이는 고르기아스에 의해 확인된 사항이다. 그리스 권력자들은 그리스 최고의 미녀가 납치되었고, 그미를 구해야 한다는 거짓된 사항을 퍼뜨렸다.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트로이 전쟁의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블로흐, 희망의 원리D: 376).

 

그밖에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등장인물, 이반은 신과 천국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장료를 처음부터 거부한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누리는 모든 환희는 지상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완전히 달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로흐, 저항과 반역: 201f). 그런데 우리는 블로흐가 묘사하는 두 가지 헬레나의 상 가운데 무엇이 유토피아에 합당한지 밝혀낼 수 없다. 또한 이반 카라마조프가 통상적인 천국과 정반대되는 천국의 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제삼의 천국을 떠올리는지 단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헬레나에 관한 그리스인들의 망령이 십여 년 동안 트로이 전쟁을 치르게 했으며, 이반이 기독교의 내세를 거부하지만, 천국과 같은 찬란한 세계가 실존한다고 굳게 믿었다는 사실이다.

 

18. 꿈은 망상이며, 동시에 세계 변화의 에너지다: 블로흐의 『흔적들Spuren』을 읽은 독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블로흐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마치 아이들이 꿈속으로 도피하는 것처럼- 독자들을 어떤 미래의 현실이라는 요새 속으로 침잠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흔적들』의 이야기는 의심스러운 꿈의 범례라고 곡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데, 이러한 갈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시스템으로서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는 나중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욕망 기계”라는 용어로 설명될 수도 있다. “욕망 기계”는 기술적 사회적 시스템으로서의 기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Deleuze: 512). 이 개념은 나중에 『천 개의 고원Tausend Plateaus: Kapitalismus und Schizophrenie』 (1980)에서 욕망의 집합체로서의 “아상블라주”로 표현되기도 했다. 갈망은 무수하게 파괴되고 파기되지만, 부분적으로는 주어진 현실에서 성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갈구하는 존재라고 해서, 이것이 유토피아의 존재 이유 내지는 가치로 성급하게 규정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 애타게 갈구하는 내용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든가 해석학의 수단을 통해서 검증될 필요가 있다. (Schmidt: 85B: 56).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