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박설호: (1) 표현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논쟁

필자 (匹子) 2025. 12. 28. 11:57

 

"소설은 신에 의해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다." (루카치)

”표현주의 예술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넘어서는 무엇을 제시한다.“ (블로흐)

 

1. 모더니즘, 새로운 사고와 예술론: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문학, 시각 예술, 공연 예술 및 음악 분야에서 실험, 추상 및 주관적 경험을 강조한 운동이다. 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예술의 영역 그리고 건축 그리고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세계관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만약 오늘날 모더니즘이 논의의 대상이라면, 토론의 주제는 항상 전통의 단절과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문학까지 이어진다. 모더니즘은 지금까지 전통 경험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른바 교양이라는 하나의 사고에 대한 집중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아방가르드의 요구에 대한 저항 역시 형성되고 있다. 동구의 리얼리즘 이론은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모더니즘의 혁신적 강박에 대한 마모 현상을 반영하면서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한다. 이를테면 문학의 영역에서 “리얼리즘”이라는 급진적 요청은 1970년대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내면화의 복권으로 바뀌게 된 것을 생각해 보라. (Schmidt 85A: 248). 어쨌든 예술적 시대 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마치 진자처럼 좌우로 움직인다. 필자는 일차적으로 모더니즘과 전통의 단절 현상을 밝히고, 표현주의 논쟁 내지는 리얼리즘 논쟁을 둘러싼 루카치와 블로흐의 서로 다른 견해 그리고 그 배후에 도사린 사상 등을 요약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전통의 파괴와 역사주의 (1): 블로흐는 1920년대에 전통의 파괴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은 1918년에 간행된 『유토피아의 정신』 가운데 하나의 단락인 “장식의 생산Erzeugung des Ornaments”에 실려 있다. (Bloch, GdU1: 20). 이 책은 지금까지 표현주의의 정신을 담은, 이른바 “청년 양식Jugendstil”이라는 예술적 조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청년 양식의 예술은 무엇보다도 장신구의 치장 내지는 장식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청년 양식의 예술은 장신구를 수용하여 좋은 방향으로 계속 발전시키거나, 변조하는 대신에, 화폭의 대상 가장자리에 치장의 무늬를 집어넣곤 했을 뿐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는 인간의 의복이 이러한 장식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항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전통의 파괴로 드러나는 “장식의 생산”이라는 주제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장식과 치장만이 관건이라면, “청년 양식”은 뒤늦게, 인상주의 이후에 출현한 모더니즘 운동과 함께 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식의 생산은 예술적 역사주의를 연상시키게 한다. 가령 “신-바로크”, “신-고딕”, “신-르네상스” 등의 건축 예술은 예술적 역사주의의 범례들이다. 여기서 전통은 고스란히 수용되고 있지 않다. 신 고딕, 신낭만주의 그리고 신고전주의의 풍조를 생각해 보라. 전통이란 새롭게 후속 세대가 지나간 삶의 세계를 다룰 때 언급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이란 새로운 세대가 지난 세대의 하나의 흔적에 관해 새로운 관점에서 관심을 기울일 때 드러나는 변화된 관점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역사주의는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역사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과거의 예술적 특징을 지금 여기 새롭게 재생산하려는 시도 내지는 예술적 의향으로 이해된다.

 

3. 전통의 파괴와 역사주의 (2): 예술 영역의 역사주의는 산업 혁명의 혁신적 문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절망적으로 저항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전통을 새롭게 구명하려고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 영역의 역사주의를 르네상스 운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19세기 말에 과거 사항을 새롭게 다루는 계획을 내세우면서,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문화적 형태에 관한 구성 그리고 기본적 요소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이룩해낸 것은 파악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건축의 영역에서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가령 시청의 건물은 신 고딕의 방식으로, 국회의사당 건물은 신고전주의 풍으로, 교육 기관의 건물들은 새로운 르네상스의 방식으로, 아직 보존되고 있는 왕궁은 바로크의 새로운 방식으로 증축되었다. 이때 고딕은 마치 시민의 특징을 드러내고, 고전주의가 마치 국가의 민주주의를 재현하며, 르네상스의 방식은 교육을 대변하고, 바로크가 궁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주의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과제 설정의 차이를 요청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세대의 문화적 형태의 특수성이 이런 식으로 이후의 사람들에 의해 마음대로 정해지고 변조되는 한, 우리는 이를 전통의 단절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4. 도구주의와 기술적 인간Homo faber: 전통의 파괴는 어떤 점에서 새로운 무엇이라는 파토스와 결부되어 있는가? 19세기의 예술의 영역은 어떤 도구적 전환기를 맞이했다. 서서히 발전되는 과학 기술은 그 자체 순수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놀라운 생산력을 끌어올렸다. 이와 동시에 예술의 제반 영역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바람이 불었으며, 산업 혁명의 여파 그리고 그 정신을 비판 없이 수용하게 된다. 이로써 생겨난 것은 이른바 “도구주의Instrumentalism”라는 예술적 조류다. 도구주의는 이른바 인상주의의 예술적 조류와 묘하게 결합한다. 인상주의는 흔히 도시와 시골에서 여가에 즐길 수 있는 일상적 풍경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오로지 시각적 방식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뿐이다. 도구주의의 분위기는 미학적 측면에서 1950년대의 기호학적 전환점을 안겨주었다.

 

이때 예술가들은 예술적 대상이 지닌 의미론적 의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대상 속에 구획된 부호 유형이라든가, 구조적 배열을 특히 집중적으로 고찰했을 뿐이다. 원래 인간의 미적 관심사는 막스 벤제Max Bense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 그리고 주위 환경에 대한 태도에 집중한다. “기술적 인간”은 도구를 통한 생산 능력을 미리 갖추고 있는데, 이로써 무엇을 생산할지를 미리 결정한다고 한다. (Bense: 32). 우리가 벤제의 학문 원칙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행위의 목표에 관한 논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기술이라는 휘장일 뿐이다. 막스 베버의 “기술적 합리성”이라는 개념 역시 도구와 기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베버의 경우 모든 기준은 오로지 과학적 기술에 의해 통제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기술이라는 마지막 낙관주의 속에 유토피아의 진정한 의미는 묘하게 탈색되어 사라질 뿐이다.

 

5. 내면과 꿈에 관한 예술적 탐색: 물론 예술에서의 수많은 운동은 기술적 생산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도구주의에 반박하고 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표현주의가 그러하다. 표현주의는 합리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예술가의 내적인 진행 과정, 형체 그리고 구조 등을 밝히기 위하여 외부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선호한다. 마력적 리얼리즘, 초현실주의 그리고 환상적 리얼리즘은 무의식적인. 혹은 최소한 전-의식적 꿈의 형상을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들은 20세기에 인간 내면의 심리적 진행 과정, 꿈속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물음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내면의 상황을 어떻게 구상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쉬르리얼리즘 문학에서 “자동 글쓰기 Ecriture automatique”라는 방식으로 출현한 바 있다.

 

그밖에 도구주의의 예술 내지는 기호학적 전환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은 내면으로 파고드는 주요 음향으로서의 어떤 해석학적 차원의 “이상적 유형”이다. 그것은 시대의 위태로운 경향을 지적하기 위한 모순된 특징을 과감하게 드러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가령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권위주의의 성격을 연구하면서, 유형학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유형학을 연구하는 자는 유형적인 무엇을 확정하지 말고, 유형에서 벗어나는 특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Ziege: 67). 주요 음색에서 벗어나는 무엇을 구조한다고 해서 그게 현실적 주요 흐름에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하나의 유형이 얼마든지 반박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게 된다.

 

6, 표현주의 논쟁에 뒤섞인 정치적 의향: 도구주의는 예술적 대상을 묘사하는 전통적 표현 방식을 과감하게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법적 다양성뿐 아니라, 예술 작품 생산의 복제 가능성에 예술적이고 미학 이론적인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Huyssen: 114).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표현주의 논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문제는 루카치와 블로흐 사이의 논쟁 속에는 파시즘과 싸우려는 “인민 전선Volksfront”이라는 정치적 노선이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인민 전선과 함께 유럽 파시즘에 대항해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놀라운 공통적 결기가 담겨 있다. (Schmitt: 31). 그렇지만 우리는 예술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중요한가? 아니면 예술 비평의 엄격한 잣대를 고수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은 정치적 대응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문제를 무시한 채 예술적 연대를 형성하여 이를 선언하게 되면, 불명확하고 기괴한 형태를 막연하게 받아들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적군에 대항해서 싸우는 나의 아군이 바로 나의 적이야.”라는 격언을 생각해 보라.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