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1
박설호
“제발 한 번만 살女 주세요.”
“어차피 당신 살아 男잖아요”
“꿈틀 물총 당신을 힘들게 하나요?
내 안에는 사랑이 꿈틀거려요.
고결한 씨주머니 알고 있나요?”
“질이 나빠 가증스러운가요?
고삐 풀린 암컷 저주한다고요?
그래서 변기통처럼 박살냈나요?”
“제발 한 번만 살女 주세요.”
“어차피 당신 살아 男잖아요.”
................
(사족) 언젠가 독일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Christoph Hein은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 연대기 서술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연대기는 타자의 과거 이야기를 가리킨다. 역사적 내용이 연대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고유한 말씀과 사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인에 의하면 타인의 말씀과 사고라고 한다. 어쩌면 다만 사람들이 갈구하고 고뇌하고 살풀이하려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는 게 작가의 숙명인지 모른다.
나 역시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 울분 그리고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짤막한 시구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도 타인의 스티커에 적혀 있는 몇몇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말이다. 인용부호인 따옴표는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묻지마 살인은 범죄다. 왜 우리는 아무런 잘못 없이 황당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유명을 달리 해야 하는가?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고찰하면, 그것은 자신의 내적인 고통을 무고한 제삼자에게 이전하는 투사 (投射, Projektion)의 행동이다. 2018년 자신의 환자인 정신 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정신과 의사, 임세원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이 떠오른다.

'20 나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설호의 시, '釜山 노인과 바다' (1) | 2025.11.05 |
|---|---|
| 박설호의 시,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2' (0) | 2025.10.20 |
| 박설호의 시, '아린 아리랑' (0) | 2025.10.14 |
| 박설호의 시, '김덕린' (0) | 2025.10.02 |
| 박설호의 시, '내가 소년이었을 때 3' (0) | 2025.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