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釜山 그대와의 오랜 이별의 서러움과 순간적 재회의 허망함을 노래한 담시 1
박설호
1. 닻 내릴 때 생각한 오랜 이별
오래 너무 오래 망망대해 떠돌다 그대 기억했어요
하나 이제 나는 낯선 남자 고객 늙어빠진 떠돌이 선장
방파제의 두 다리 쫙 벌어지면서 그대의 속살이
비치고 서서히 입항하는 죽음의 선박 정녕 과거를 잊은
과부인가요 체념한 게이샤인가요 부산 그대는
2. 사라진 영도 해안
그대는 지금 어디서
기다리고 계세요
남녘 땅 철새 떼는 간 곳이 없고 헤엄치며 뛰놀던 유년의 백사장 적기 앞 갈매기섬은 매립된 지 오래 메말라버린 그대의 땀 그리고 체액 나이 든 그대의
알몸을 그냥 가리는
매연과 동거리들
3. 태종대 에움길(the long and winding road)
어느새 자가용이
이렇게 많아졌나요
아스팔트로 화장한
그미의 팔다리
삼륜차가 달리던
신작로였어요
아지랑이 반주에
춤추던 흙먼지
적지만 그런대로
푸르던 숲 대신
그미의 고름 딱지
버섯마냥 솟구친
아파트 단지
4. 고갈산을 오르며
해안가의 무덤은 멍때리는 나의 친구
할머니의 통곡 소리 지구를 들어 올린다며 물구나무서던 나의 어린 시절 애처로워요 여기에 꽂혀 있던 이정표 나무판 보이지 않으니까요 아이스크림 먹던 나의 앙가슴 그만 당신의 사랑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이제 길 가로막는 철조망 탄약고 피멍 들고 만 그대의 살갗 강제 사역으로 까맣게 탄 내 얼굴을 머리칼로 가리던 그대
달콤한 너무 오달진 당신과의 첫 키스
5. 서면 오거리에서
나의 기억 기억은
온통 화염병
우리의 죽마고우
쇠파이프 맞고
피 흘리던
그대의 가슴 터
어느새 지하철 역사로
변해버렸네
움직이는 생명은
보이질 않고
장승처럼 우뚝 선
부동산 건물
아이들의 입에는
고물 주고 바꿔 먹던
갱엿 대신에
미국식 햄버거와
플라스틱 포크
6. 해운대 천사의 시
제가 생각나면 당신은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 불렀지요 자식 학비 때문에 포장마차 차린 게 남우세스럽다며 카바이드 불에 등 돌려 문예지 읽던 당신 직장 잃은 남편 마약상으로 돌변하고 멍든 눈 손목 상처로 눈물 흘리는 당신 아 나는 다만 그림자 힘없이 당신 곁에 있었지요
제가 생각나면 당신은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 불렀지요 아내 잃은 깡패 당신에게 눈독 들이고 어느 날 포장마차 부순 뒤 덮쳤지요 애걸하고 반항하던 당신 어둠 속에서 앞섶 가리던 당신 몇 달 후 조산원 앞에서 비틀거리던 당신 아 나는 다만 그림자 힘없이 당신 곁에 있었지요
당신과 통방하고 싶어요 어디 계신가요 막힌 푸른 하늘 그 위로 향해 벽 뚫고 계신가요 “죽일 년”의 세상 그래 “죽임에 눈먼” 세상 그렇다면 당신의 고향은 지하인가요 아니면 별승인가요 당신의 영혼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땅 아래로 아라 밑으로 무턱대고 흙만 파고 계신가요
7. 완월동 입구에서
야릇한 냄새 나는
그대의 자갈치시장 지나
여기는 가라오케
저기는 일식 초밥집
현지처의 암내인가
아 나는 감히 그대의
오염된 이불 속에서
몸 풀 수 없구나
돈으로 짝짓기하려고
그대의 앞섶 더듬는
일본인 행인이여
당신은 찾지 못하리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우리의 발정기 그
비너스의 황홀을
8. 낙동강 하구에서
“자태야 있건 없건
잘 살면 되지” 하는
그대 목소리
사랑은 부끄러운
장난이 아니라며 갈대
숲 가슴 두근거리던
두 개의 물방울
붉게 포옹하던
을숙도의 어스름 이제
그대의 얼굴에는 주름
폐수에 칠갑하고 만
검붉은 립스틱
9. 부산 여자의 대꾸
“흥, 지가 무슨 왕건이가? 작별 인사 없이 배 타고 떠났다가, 십 년 후에 돌아와서 나를 찾아? 내가 순애보 가락 뽑으며, 니하고 떡이라도 칠 줄 알았더나? 퍼떡 거울을 들여다바라. 갈라진 흙덩이로 주름진 지 얼굴, 늙은 수컷 삼치 대가리를. 이제는 어디론가 꽁무니 뺄 생각은 접어라. 땅 파고 항구 매립하고, 갱제를 살리야 돈이 능준할 꺼 아이가? 옛날만 새김질하고 자연이 어쩌구 환경이 저쩌구 씨버리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가?”
...................
출전: 박설호 시집, 내 영혼 그대의 몸속으로, 강 2025.

1970년대 해운대

2020년 해운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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