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a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박설호: (1)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

필자 (匹子) 2026. 6. 28. 15:45

1. 윈스탠리의 직접적인 개혁을 위한 외침: 제라드 윈스탠리 (Gerrard Winstanley, 1809 - 1676)의 유토피아는 주어진 현실의 직접적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17세기 유럽에 출현한 여러 유토피아와의 차별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19세기 초 산업 혁명의 시대 요청을 떠올릴 만큼 노골적으로 현실 개혁을 요구합니다. 윈스탠리의 유토피아는 17세기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를 훨씬 뛰어넘는 요구사항을 내세웁니다. 그 이유는 17세기 중엽의 영국의 정치적 분위기가 당시의 유럽 본토의 절대 왕정의 그것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일찍이 시민 혁명을 거쳐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토대를 굳건히 다진 바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윈스탠리가 추구한 소작농의 자유 내지 평화롭게 생업에 몰두하려는 부르짖음은 혁명적 퓨리턴주의의 혁명적 좌파 진영의 개혁안에 힘입어서 상당부분 실천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윈스탠리의 개혁과 혁명의 의지 속에는 르네상스 유토피아의 어떤 한 가지 특징이 도사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가령 그의 개혁안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천년왕국에 관한 갈망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2. 참담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유토피아의 설계: 윈스탠리는 영국의 정치가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유로운 인간이 만들고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토머스 홉스의 사회 계약의 이론을 마치 증명해내기라도 하듯이, 『자유의 법The Law of Freedom』(1652)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의 초기 사회주의자, 윈스탠리는 홉스의 견해, 그 이상을 추적하였습니다.

 

홉스는 『레비아탄Leviathan』(1651)에서 자연 상태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갈등은 윈스탠리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의 외부적 상태에서 출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윈스탠리는 홉스보다도 더 첨예한 견해를 드러낸 셈입니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영국 국가는 개개인의 관심사 내지 요구사항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한다. 이로 인하여 지구상에는 수많은 전쟁, 학살 그리고 싸움과 갈등이 출현하고 있다.” (Winstanley: 32f).

 

3. 문제는 실천이다: 윈스탠리는 지금까지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처음으로 추진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과감하게 실제 현실에 혁명적으로 적용하는 과업이었습니다. 윈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과 글이 아니라, 오로지 실천만이 인간의 올바른 심성을 증명해줄 것이다.” (Schölderle: 90). 그때까지 유토피아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설계한 이상적 사회 구도를 하나의 실질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어떤 급진적 전복을 요구하기는커녕 어떠한 신선한 정책이 실제 현실에 나타나기를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실천에 관한 문제는 윈스탠리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당시에 전쟁 외에는 어떠한 정치적 개혁도 세상에 출현한 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스탠리의 놀라운 발언을 통해서 처음으로 새로운 사상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4. 천년왕국설과 사회 혁명: 윈스탠리의 사상이 비록 사회 계약의 이론과 접목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살던 현실은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습니다. 왕이 저지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일상의 삶은 중세의 봉건적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적 퓨리턴주의가 17세기 영국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영국 사람들은 천년왕국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습니다. 폭정과 가난으로 이루어진 현실은 하루아침에 전복되고, 우주의 질서는 새롭게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게 천년왕국설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기대감이었습니다.

 

만약 우주의 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 신의 사랑은 지구를 환하게 밝히게 되고, 기존 국가의 법과 군대의 체계는 일순간 종언을 고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대감은 결코 사회 체제의 패러다임의 형식적 변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질적인 변환과 관련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사고는 1642년부터 1649년 사이에 영국에서 발발한 오랜 내전과도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윈스탠리가 혁명적 퓨리턴주의의 좌측 진영에 포진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시 횡행했던 천년왕국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5. 윈스탠리의 삶 (1): 제라드 윈스탠리는 1609년 랭커셔의 위건에서 가난한 면직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윈스탠리는 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라틴어 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런던으로 건너가 어느 면직물 노동자의 과부인 사라 케이터의 집에서 기식하며, 테일러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그곳의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1637년에 윈스탠리는 런던의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대도시에서 독자적으로 모직을 판매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7세기 중엽에 영국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7년 동안 내전이 치러졌는데, 이로 인하여 윈스탠리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하게 됩니다.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이곳저곳에서 빌린 사업 자금을 갚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혁명적 퓨리턴주의의 좌파에 가담하였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다음에 윈스탠리는 런던 남동쪽에 위치한 슈리의 어느 백작의 영지에서 임금노동자로 잠시 생활합니다. 당시의 시기까지 그는 추측컨대 런던 침례교회의 공동체에서 평신도의 설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648년 원스탠리는 신앙 공동체, “탐구자들Seekers”에 가입하였습니다. 탐구자 공동체는 성서 외에는 어떠한 문헌, 어떠한 체제도 용인하지 않는 급진적 종교단체였습니다.

 

6. 윈스탠리의 삶 (2): 바로 이 시기에 윈스탠리는 봉건주의를 급진적으로 타파하고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평등파Leveller” 내지 “채굴 당Digger”에 가담하였습니다. “평등파” 그리고 “채굴 당”의 좌측 진영은 1648년에 함께 뭉쳐서 급진적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 개혁을 위하여 어떤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며, 어떤 놀라운 사항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사유재산제도의 철폐 그리고 화폐의 폐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없어지고, 화폐가 철폐되어야만 진정한 혁명이 실현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공동체의 대변인을 맡은 사람은 윌리엄 에버라드William Everard였습니다.

 

윈스탠리는 에버라드와 함께 수많은 팸플릿을 작성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정의의 새로운 법The New Law of Righteousness」(1649)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차제에 지속적으로 진정한 평등파의 프로그램으로 활용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회를 장악한 세력은 대지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평등파 내지 채굴당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혁 의지를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윈스탠리는 혁명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인민에게 결코 폭력을 사용하자라든가, 한 번도 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자고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가난한 농부들이 다만 자그마한 자투리땅이라도 차지하여 농사짓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7. 윈스탠리의 공동체의 실험과 당국의 탄압: 1649년에 찰스 1세는 의회파의 크롬웰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이때 윈스탠리는 동지들과 함께 성 조지 힐 근처에서 농업 공동체를 영위하려고 계획합니다. 그것은 바로 “평등 파” 내지는 “채굴당”의 농업 공동체였습니다. 농업 공동체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에 필요한 사항만을 인근 대지주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로써 대지주 한 사람은 나중에 스스로 자신의 땅을 포기하고, 공동체에게 모든 권리를 이양합니다. 처음에는 농업 공동체는 순탄하게 영위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윈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일하고 땅에 하나의 초석을 박을 것이다. 거기에는 땅이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막론한) 만인을 위한 공동의 보물 창고라고 기록될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인 땅으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을 것이다. 땅은 창조자의 이성에 합당하게 인간을 출산시킨 어머니가 아닌가?” (Berneri: 138).

 

그러나 윈스탠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영국의 중앙 정부가 전국의 대지주와 합세하여 윈스탠리가 속해 있던 30명의 노동자와 농부들을 탄압하였던 것입니다. 경찰이 들이닥쳐 그들의 마차와 농기구를 모조리 파괴하고, 거주지를 몰수하였으며, 농부들의 수확물을 불태워버렸습니다. 1650년 결국 농부들 가운데 주동자 모두가 체포되자, “평등파” 내지 “채굴 당” 사람들이 추구하던 공동체의 삶이라는 실험은 해체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윈스탠리와 에버라드는 법정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의 삶을 영국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들은 삐라를 뿌리거나, 영국 하원에 들어가 자신의 뜻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득권 계층의 몰이해로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8. 윈스탠리의 삶 (3): 윈스탠리는 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방대한 문헌을 집필하여 발표합니다. 이것이 바로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1652)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종교적 신비주의에서 합리적 무신론으로, 농업 개혁에 대한 대안으로부터 완전한 공동체 유토피아로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윈스탠리는 소작농들에게 자투리땅이라도 마련하여 약간의 곡물이라도 수확하게 되면, 대지주들은 황폐한 땅을 개간한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선사하리라고 막연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감은 그야말로 순진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군대가 인민에게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한, 소작농들이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윈스탠리가 자유의 법을 집필하여, 누구보다도 올리버 크롬웰에게 직접 보내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문헌은 찰스 1세의 처형 이후의 영국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물론 윈스탠리는 크롬웰 장군이 자신의 구상안을 실천에 옮기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