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박설호: (1) 하인츠 페촐트의 '루카치 후기 미학'

필자 (匹子) 2025. 10. 2. 10:30

하인츠 페촐트 (Heinz Paezold, 1941 – 2012)는 1972년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미학 연구”로 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3년 이후로 북독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관념론의 미학. 바움가르텐, 칸트, 셸링,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 이후에 나타난 미적 합리성의 이념에 관하여”이다. 본 원고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Gvozden Flego u. a. (hrsg.) Georg Lukács – Ersehnte Totalität, Bocum 1986, S. 187 – 195. 필자는 그저 그의 글을 한국어로 번역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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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후기 미학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루카치는 모더니즘 미학을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모더니즘 예술은 루카치에 의하면 파멸 내지는 퇴폐적 파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고전에 해당하는 쇤베르크, 칸딘스키, 클레, 제임스 조이스와 사뮈엘 베케트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현대적 모더니즘에 해당하는 애드 라인하르트, 잭슨 폴록 등에 관해서도 루카치는 추호의 필요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더니즘 예술 속에 은폐된 질적인 새로움은 루카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Paezold: 1984: 40f). 그렇기에 우리는 루카치의 후기 미학의 가치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밖에 없다. 모더니즘 미학의 특징과 장점은 오히려 벤야민, 아도르노 그리고 블로흐에게서 발견될 뿐이다. (Paezold 1974: 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루카치의 후기 미학의 문헌을 통째로 파기할 수는 없다. 가령 뤼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의 『현대 소설의 사회학Soziologie des modernen Romans』 (1970)이라든가, 체코 유대인 출신의 소설가,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Friedrich Torberg의 『실천의 미메시스와 추상 예술Mimesis der Praxis und abstrakte Kunst』에 관한 루카치의 해명은 날카롭고 정당하다. 나아가 레오 코플러Leo Kopler에 대한 루카치의 분석 역시 놀라운 소중한 내용을 전해준다. 특히 토어베르크의 문헌에 대한 루카치의 논평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둘째로 루카치가 말년에 추적한 실천의 철학은 전적으로 유효하지 못하다. 왜냐면 반영 이론에 대한 구상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언급되는 파블로프의 심리학에 기초한 언어 이론은 상호 어긋난 불일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미하일로 마르코비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인식 이론의 기본 문제를 다룰 때 반영의 구상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실천이라는 카테고리의 구체적 역할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사항을 통틀어서 한꺼번에 통합하여 논의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Markovic: 23).

 

I.

루카치 후기 미학이 표방하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권으로 이루어진 루카치의 “미적인 것의 고유성”을 명저라고 칭하고 싶다. 물론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결정적 하자가 드러나고 있지만 말이다. 만약 루카치의 문헌을 그의 제자들의 시각으로 세심하게 독파하면, 우리는 저자에 대한 보다 적절한 이론적 관점을 도출해낼 것이다. 나는 여기서 아그네스 헬러 Ágnes Heller, 죄르지 마르쿠스 György Markus, 페렌치 페허 Ferenc Fehér, 헤게뒤스 Hegedús 등의 연구 논문을 지적하고 싶다. 루카치의 후기 미학에 관한 문헌을 독파하면, 우리는 어떠한 이론적 논거를 접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루카치는 예술의 고유성을 역사적 측면에서 재구성하려고 한다. 첫째로 그것은 일종의 마력과 같은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술은 과거에 복합적 마법의 행위로부터 일탈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발전 과정의 초기 단계는 구석기 시대의 예술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기에 드러나는 특징은 추상적 장식, 리듬 그리고 대칭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마력은 루카치에 의하면 선사시대의 세계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복합적 시도였다. 기술, 노동, 학문, 예술 등은 구분되지 않은 일원성으로 머물고 있었다. 루카치는 다양한 문화사 및 인간학의 연구에 근거하여, 마력이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를 구명하고 있다. 그가 동원하는 학문적 내용은 아놀드 하우저, 말리노프스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 등의 문헌들과 관련된다. 그런데 루카치는 이와는 별개로 마법과 예술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하고 있다.

 

둘째로 예술은 틀림없이 일상생활에서 개념화된 것이다. 일상의 삶은 세계를 예술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며, 목표라고 한다. (Lukács I: 39ff).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의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 즉 신시대의 철학에서 일상의 삶은 여러 가지 특성 가운데 중점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독일에서 비판 철학이 발전되었으며, 일상의 활기 넘치는 삶을 집중적으로 요구한 철학자는 포이어바흐 그리고 마르크스였다. 니체와 키르케고르의 경우에는 개별적 사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로 인해 일상에 대한 시각이 편협하게 좁혀진 바 있다.

 

문화를 객관적으로 구명하려면 철학자들은 삶의 실제라는 근원적 면모를 밝혀야 한다. 20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현상학과 인간학을 통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모든 문화적 형태들은 실제 삶을 근원적으로 밝혀나가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학문적 노력에 대해 루카치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드러낸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일상의 삶을 두 가지 이중적 시각으로 고찰하는 과업이다. 한편으로는 일상적 삶의 구조를 도출해내는 게 관건일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말하자면 실제 삶의 실증주의의 관점이 우선시되고 있다. 루카치는 일상적 삶을 다음과 같은 구조로 규정한다. 즉 자발적인 물질주의가 일상적 삶의 유형이라고 한다. 이는 유사성을 파고드는 사고만큼이나 유형적이다.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떤 기능적 실증주의라고 한다. (Lukács I: 44f).

 

일상적 사고는 한마디로 일반화의 특징 속에서 실행된다. 일상적 사고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상상 영역을 일깨우는 소환 작업이 작동된다. (Lukács I: 405). 다시 말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자의 상상 공간에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일상에 대한 분석이 아무런 관련성 없는 태도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낯설고 생경한 구조들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즉 일상에 대한 비판은 폐쇄적인 무엇을 개방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 루카치에 의하면 일상만이 예술, 과학, 종교, 윤리 등의 근원적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형에 합당한 객관화 작업이 필요하며, 이것이 일상의 삶을 비판하도록 작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 그리고 유형적 객관화 사이의 변증법을 도출하여, 이를 실천을 위한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 (역주: 일상성에 관한 연구는 아그네스 헬러 그리고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서 개진된 바 있다.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강수택: 일상생활의 패러다임, 민음사 1998. 르페브르에 의하면 일상은 소외되고 식민화되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본주의의 관계 극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예컨대 인간의 소외 그리고 물화의 현상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로 진정한 의미의 장소 유토피아로서의 도시 계획이 요청된다. 이는 “없는 곳”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있는 곳”으로서의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재창조를 가리킨다. 설령 이러한 장소 유토피아가 도시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작은 공간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 (푸코)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여기서 루카치 후기 작품의 놀라운 관점이 드러나고 있다. 즉 예술과 학문은 일상적 삶과의 단절 그리고 부딪침을 예리하게 지적한다는 점 말이다. 예술과 학문은 인간의 의식을 물화의 현상을 해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세상에는 인간과 사회의 형상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즐비한데, 학문은 기능상으로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게 한다. 이로써 학문은 인간 인식의 수용력을 더욱더 확장하게 된다. 이는 학문이 세계를 표현하는 동질적 매체를 추적함으로써 가능하다. 학문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판에 박힌 통상적 시각은 차단되고, 기능상의 관련 구조 역시 변형된다. 루카치는 학문의 이러한 기능적 경향을 고찰하면서, 고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회의주의의 노선을 소환해낸다. 이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로티노스의 경우처럼 모순적인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러한 경향은 신시대에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모순적인 발견으로부터 홉스 그리고 초기 스피노자 그리고 마르크스까지 이어진다. (Vgl. Lukács I: 139 – 206).

 

학문적 인식은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한 세계에 관한 의식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의 사명은 루카치에 의하면 인간적 자의식의 관점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예술적 모방이라는 방식으로 반영하는 데 있다고 한다. 예술은 인간을 포괄하는 자의식의 형성에 기여하는데, 그 자체 이를 위한 효과적인 기획자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예술 속에는 특수한 자기 인식 그리고 세계 인식이 뒤섞인 채 공존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술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Lukács I: 582f).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