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박주하의 시, '줄에 관한 생각'

필자 (匹子) 2025. 11. 14. 08:54

줄에 관한 생각

박주하

 

거문고에 줄이 없었더라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 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며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 줄에 매달려 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박주하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 사람 2021. 36쪽 이하

 

.........

 

박주하 시인은 경남 합전에서 태어나1996년 "불교 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항생제를 먹은 오후" (2003), "숨은 연못" (2008)이 있다.

 

"거문고"의 줄, 생의 바닥에는 열망과 충동이 부글거리고 있다. 연주자와 거문고는 혼연 일체가 된다. 어쩌면 그것은 임산부와 태아 사이의 관계라고 할까. 이렇듯 사람들은 "탯줄"이라는 인연의 끈으로 태어나 평생 서로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간다.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만큼 귀한 게 어디 있으랴?

 

줄, 줄이다. 동앗줄도 있고, 황금 줄도 있다. 그런데 줄이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옥죄이기도 하고,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한다. 그래, 서로의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대어 "약속"하는 게 인간미 넘치고 즐거운 일이다. 불안 때문에 봉분을 쌓듯이, 불안 때문에 친구를 찾는다. 힘들 때는 서로 위로가 되니까. 

 

줄, 인연의  줄. "얇아지고 가늘어지는" 줄. 나이가 들면 인연의 줄, 관계 망이 번거롭게 여겨진다. 친구와 지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 정년 퇴직한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많은 수많은 연락처 그리고 주소지면,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이제 그들과의 관계는 "낡고 희미해져" 서서히 소원해진다.

 

죽음의 길은 어쩌면 사랑의 줄, 인연의 줄이 약화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나누었건만, 저승으로 향하는 여행은 언제나 고독으로 감당해야 한다. 물론 "요양원의 링거 줄"이 내 생명을 어느 정도 연장시켜줄지 모른다. 줄, 생명의 줄, 인연의 줄, 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다.